2. 한 사람을 만나는 세계

by 지안의 문장


깜박이는 커서는 마치 날카로운 시선이 머물러 있는 듯 질문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요?”


그 커다란 질문 앞에 바로 맞서기에는 겁이 많은 편이다. 약속을 지키듯 새하얀 식탁 위에 써왔던 글이 담긴 이면지를 꺼내어 두고 손에 익은 펜을 든다. 징크스라고 부를 수도 있고, 규칙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사각사각. 펜 끝이 종이를 지나 글자들이 생겨나면 비로소 만들고 싶었던 세계가 뿌연 안개를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낸다.


펜을 꽉 쥐고 하얀 종이 위에 적힌 한 사람이 들어있는 방에 들어가기 위한 노크를 한다. 조심스레 두드리는 그 노트 안에는 깊은 고민이 담겨있다. 이렇게 두드릴까? 저렇게 두드릴까? 어떻게 두드리면 그 사람을 제대로 만날 수 있지?


이야기의 뼈대보다 사건의 전개보다 중요한 건 결국 ‘인물’이다. 작가가 어떤 인물의 세계를 짓느냐에 따라 그가 던지는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 되기도 한다.


만들려는 세계 속 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의 이름은 '은수'다. 이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노크를 하기에 앞서 지난밤의 산책을 떠올린다. 늦여름이 지나가며 선선한 바람 안에 가을이 들어서던 밤이었다. 남편과 아이의 손을 잡고 걷다 아이가 좋아하는 물고기를 보러 마트에 들렀다. 네모난 수조 안 옅은 조명 아래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들.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작은 생명체는 그저 아가미를 벌렸다 오므리며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가치를 갖는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평화로운 수조의 풍경 위로 며칠 전 뉴스에서 본 한 청년의 얼굴이 겹쳐졌다. 유명 베이글 카페에서 일하던 청년. 꿈을 꾸기 위해 남들이 좋다는 직장에 들어가 최선을 다해 삶을 증명하려 했던 사람.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증명의 끝에서 삶이 멈춰버렸다. 사람들은 슬프고 시린 죽음 앞에서도 진위 여부를 따지며 증거를 들이밀었다.


‘그 일은 그가 원한 것이었어요.’


잔인한 엇갈림 앞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은 꼬리를 문다. 존재하는 것 이상이어야만 삶의 가치가 만들어지는가. 자신만의 숨을 쉬어서는 안 되고, 기대하는 숨을 쉬다가 스러져도 무언가가 되어야만 비로소 ‘가치’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건가.

그 질문은 돌연 방향을 틀어 나를 겨누는 화살이 되었다.


'너는 정말 잘 살고 있어?'


아이를 키우며 내 존재의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늘 불안이 심어져 자라나고 있다. 사람들은 삶을 쪼개어 하나씩 이뤄내는데 아이를 어린이집에 더 오래 맡기고 늦게까지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경제적 생산성이 없는 나는 도태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날카로운 우려와 걱정이 화살촉을 더욱 뾰족하게 갈아 마음을 정조준한다. 이 화살은 어리석은 스스로가 겨누는 화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말 스스로 당긴 시위였을까? 충분하게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는 시선들에 내가 지레 두려움을 느꼈던 건 아닐까.


다시 이면지로 마음을 돌린다.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모아 은수라는 인물의 방문을 두드린다. 몇 번의 다양한 노크 끝에 완벽한 세계를 이룬 은수를 만났다. 부모가 원하는 대학, 사회가 인정하는 직장,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봉까지. 성실하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온 사람이다. 그토록 완벽하게 빚어진 알 속에 공허한 질문을 심는다.


"당신의 의지대로 숨 쉬고 있습니까?"


은수를 문장으로 묘사하며 자꾸만 옆에서 잠든 나의 아이를 겹쳐 보게 된다.


‘아직은 숨 쉬고, 먹고, 웃는 것만으로도 박수받는 너. 하지만 네가 살아갈 세상에서 너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지금의 너를 존재만으로 마음껏 사랑하는데 훗날의 나는 네가 번듯한 무언가가 되어야만 너를 사랑하게 될까.’


만들어지는 희곡 속 은수를 만나는 일에서 먼 미래의 내 아이를 이미 마주한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펜을 꽉 쥔 손을 움직여 써 내려간다. 물고기가 되고 싶어 했던 은수의 이야기를. 이미 무엇이 되어 있을 세계에서 그저 자신만의 숨을 쉬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기를.


이면지 위로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은수의 세계에서 숨 쉬는 순간을 기대하며 깜박이는 커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천천히 두드려질 방문이 열리면 그 안에 들어가 구석구석을 바라보는 다정하고 예민한 눈을 갖길 바란다.

이전 01화1. 꽉 쥔 손안에 든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