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알파벅스
여기, 이제는 사라져 버린 마을에 관해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
지명은 소몽(笑夢). 笑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뜻인 웃다. 두 번째 뜻인 꽃이 피다. 마지막 뜻인 개가 사람을 반겨 짖는 소리. 하지만 소몽리는 이후 충몽(蟲夢)리가 된다.
소몽리가 벌레로 가득한 지역이 되게 된 이유는 '역시나' 인간 때문이다.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가 마을에 쓰레기를 버리고 갔고, 그것이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은 서로에게 쓰레기를 떠넘기게 되었다. 마을에 쓰레기가 불어났다. 쓰레기 마을이 되기 이전에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말할 수 있게 (인물 '정'의 말대로라면 다행스럽게도) 벌레가 쓰레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벌레는 마을을 잠식했다.
결국은 인간이 문제라는 식의 간편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생한 환경문제는 많은 학자가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잘못.
아르네 네스에 따르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문제는 인간이다."
'정'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알파벅스를 개발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구원으로, 충몽리, 아니 소몽리에 만연한 벌레(해충)를 박멸하기 위해 단 하나의 알파벅스를 방생한 인물이다.
벌레처럼 생긴 로봇의 임무가 벌레를 사냥하는 것이었다면, 정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누구든 얼마간 유추해 볼 수는 있지만 답을 알려주지는 않을 거라고, 익명의 소설가는 말한다.
그렇다. 작품은 계속해서 누군가의 말을 빌린다.
사회학자, 사회경제학자, 지리학자, 문학 평론가, 심리학자, 범죄 브로커, 방역 전문가, 여행 전문가, 기계공학자, 곤충학자, 범죄분헉학자, 소설가, 정치학자, 신학자, 그리고 '나'까지.
많은 이가 작품에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을, 생각을 설파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그들의 의견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
하지만 어떨까. 폐허 위에 지어진 낙원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 와 우리 세상에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는 정말로 낙원에 살고 싶은 것일까?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무엇일까?
그리고 당신은 기록을 얼마나 믿는가.
누군가의 기록을 얼만큼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인간은 기록된 것만을 믿지 않으며 그 어떤 거대한 그림자로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고, 현재를 살고 있는 바로 우리는 믿고 말한다.
아래는 2024년 4월 <알파벅스>를 읽고 남긴 감상.
1. 이원석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이어져 오던 '믿음'에 관한 탐구가 이 작품에서도 진행되어 인상적이다. 특히 <건너편의 기도>를 좋아하는데, 해당 작품에서 다룬 믿음과 이번 작품에서의 믿음의 종류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건너편의 기도>에서는 무한한 믿음, 믿지 않아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 인간고 인간 사이의 따뜻한 연결이 주된 인상이었다면, <알파벅스>의 믿음은 믿지 않는 것에 대한 발화, 의심, 표면적으로는 믿는다고 진술하면서도 실은 믿지 않는 것에 관하여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정리하면, <건너편의 기도>는 믿음에 대한 믿음을, <알파벅스>는 믿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2. 지금까지 관심이 있었던 분야는 하이퍼객체라 명명할 수 있는, 인간의 힘으로 다루기 어려운 재난, 재앙 등이었는데 <알파벅스>에서 제시되는 환경 재난은 벌레, 쓰레기, 그로 인한 악취와 같이 어딘가 인간이 곧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인상이 들어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소몽리가 충몽리가 되는 과정, 웃음이 벌레가 되는 과정, 인간이 벌레가 되는 것은 포스트-팬데믹 시대의 성공적인 형상화라고 생각되었다. 팬데믹 이후 우리는 이제 '안전'과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겠으나, 작가님께서 제시하신 대로 결말은 '공멸'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포스트-팬데믹 시대는 결국 "폐허 위에 지어진 낙원"인 것이었다.
3. ~학자가 설명하였다는 식의 진술, 각색된 소설이라는 진술로 계속해서 독자를 현재로 이끌어내는 서술 방식이 재미있었다. 작품에 몰입하다가도 중간 중간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독자가 서사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장치가 작가-독자간의 상호주체적 창작-독서 과정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