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프린터

by 맑을담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내릴 때마다, 건물 안의 공기도 느리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우산을 털며 들어왔고, 복도 바닥엔 젖은 발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그녀가 떠난 층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런데 그날, 프린터가 멈췄다.

종이가 걸린 것도 아닌데 출력이 되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프린터 덮개를 열었다.

토너 냄새가 공기 속에 번졌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리듬이었다.


“여기 아직 고장 잘 나네요.”

그녀였다.

우산 끝에서 빗물이 떨어졌고,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손에는 회의 자료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비가 오니까 프린터도 쉬고 싶은가 봐요.”

그녀가 웃었다.

나는 프린터 옆 탁자에 놓인 종이컵을 바라봤다.

“오늘은 향기가 늦었네요.”

“비가 오면, 커피보다 우산이 먼저 생각나서요.”


그녀는 프린터에서 뽑힌 종이를 한 장씩 정리했다.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종이 위를 미끄러지던 그 순간 —

그녀가 말했다.

“가끔은 이 층에 내려오고 싶었어요.”

“왜요?”

“그냥요. 조용하잖아요. 그리고… 여긴 제가 처음 웃었던 자리라서.”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어깨에 비가 조금 묻어 있었다.

무심코 내 손이 움직였다.

책상 위에 있던 휴지를 건넸다.


그녀가 받으며 웃었다.

“오늘은 커피 향 말고, 토너 냄새네요.”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들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프린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기계음이 일정한 박자로 울렸다.

비와 함께, 마음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내일은 날이 갤까요?”

“글쎄요. 그래도 오후 두 시 반엔 향기가 나겠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의 발자국이 사라진 자리에서,

프린터가 한 장의 종이를 토해냈다.


맨 마지막 줄엔, 그녀가 출력한 문장이 남아 있었다.


‘함께 있지 않아도,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공기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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