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두려움의 압박을 견디는 당신에게
고백하자면 요즘도 200일된 아기를 안아서 재우고 있다. 저녁에는 남편이 재우기 때문에 보통 두 번의 낮잠 시간마다 아기를 아기띠로 안아서 재우는 셈인데 주변에 이 사실을 말하면 '아기 안아서 재워 버릇하면 고생한다, 수면 교육은 빠를 수록 좋다'는 말을 듣게 된다. 하지만 잠 자기 싫다고 혹은 혼자 있기 싫다고 우는 아기를 방에 두고, '내가 아무리 울어도 엄마는 오지 않는구나'를 학습시키는 것은 아기에게도 나에게도 가혹하다. 굳이 아기에게 그런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아직 아기가 가볍고, 아기와 가슴을 맞대고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좋다. 글을 이렇게 시작하니까 아기 수면 교육에 대한 글을 써야할 것 같지만, 최근에 아기를 안아서 재우는 그 시간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루틴이 생겼는데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기가 자는 방에 우리 부부의 책장을 넣어두었다. 딱히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고, 거실에 부부의 책상을 두 개 다 놓으려니 거실에 있던 책장이 갈 곳이 필요해졌고, 마침 아기 방에 웃풍이 들어 그걸 가릴 셈으로 책장은 그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졸려하는 아기를 아기 띠로 안고 그 앞을 서성이다 보면 '아 이런 책도 있었지' 하며 책을 꺼내 들게 된다. 내 가슴에는 따뜻하고 말랑한 아기가 꼬물거리고 있고, 나는 손을 뻗어 책을 집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 글을 읽는다. 집에는 아무 소음도 들리지 않고, 핸드폰도 저 멀리 있어 아기와 나 책만 있는 그 순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아기가 잠들기까지 약 20분 정도 목적없는 독서를 하다보면 물론 이런 책을 왜 샀나 싶기도 한 책도 있지만, 이런 내용이 있었나 싶을만큼 귀한 책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오늘은 내 눈에 정유정 작가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책이 들어왔다.
이 책은 남편과 친구이던 시절 남편이 추천해준 책인데 서점에서 작가의 플로로그만 보고 홀딱 반해 산 책이다. (그 프롤로그는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그 페이지를 찢어 책상 앞에 붙여놨다가 잃어버렸다. 너무 간직하고 싶은 글귀는 절대 찢어서는 안된다) 오늘은 그 책을 읽다가 약 7년 전의 내가 귀퉁이를 접어 둔 페이지를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고 싶다.
소설을 쓰는 동안 세 가지 두려움에 시달린다. 초고를 시작하기 직전엔 두려움을 넘어 막막하기까지 하다.
알래스카 설원에 꽃삽 하나 들고 그걸로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기분이다.
나 자신이 너무나도 의심스럽다.
내가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
초고를 끝내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 정말로 의심스럽다.
과연 이걸 끝낼 수 있을까?
퇴고를 하고 나면, 세상에 나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렵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글쓰기도 결국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두려움과 의심의 압박을 이겨내야한다. 이겨내지 못하면 펜을 놔야한다.
그 밑엔 7년 전의 내가 '이게 맞나? 내가 이 글을 써도 되나?라는 두려움과 의심의 압박을 이겨내야한다'라고 적어둔 메모까지... 7년 전에 나는 무슨 글을 쓰고 싶었길래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을까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땐 정말 글에 진심이었다. 글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었으니까.
꼭 글 쓰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나? 내가 해도 되나?' 싶은 도전을 하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7년 전의 내가, 7년 전에 내 마음을 온통 흔들었던 작가님이 다시 부활해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알래스카 설원에 꽃삽을 들고 제국을 건설하겠다 마음 먹었으면, 이 정도 두려움과 막막함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라는 호통과 함께.
대작을 쓰는 작가님도 매일 자신을 의심하고, 두려움의 압박을 받는다는데 나라고 피할 수 있나. 내가 이런 압박감을 느낀다는 것은 두렵고 의심할만큼 멋진 꿈을 꾸고 있고, 내 깜냥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이겨내지 못해도 세상은 무탈하게 흘러가겠지만, 내가 이루고자 했던 그 꿈을 내려놔야할 것이다. 아직은 이겨내고 싶다. 이 두려움과 의심의 압박 속에서 더 성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