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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혜 Jun 02. 2024

현미경과 망원경

제약회사와 식약처에서 느낀 관점의 차이

"다녀보니까 어때요? 뭐가 좀 달라요?"


제약회사에 입사한지 만 8개월이 되어간다. 회사 업무는 어떤지 질문을 가끔 받는다. 이전 직장이었던 식약처와 비교해 어떤지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많이 다르네요. 전에는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현미경으로 보는 느낌이에요. 망원경으로는 넓게 보이는 대신에 자세히 보이진 않았는데, 지금은 속속들이 자세히 보이네요.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아요."


매일 아침 들어가는 중간관리자 회의에서 온갖 이슈들을 8개월 동안 봐 온 결과다. 물론 자세히 봤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판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정도 알게 된 거다.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걸 보면서, 공장 실무에 대한 관점은 규제기관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걸 새삼 느꼈다.


공장 실무에서는 규정 말고도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만 한다. 특히 원가와 리소스, 일정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에 문제가 없어야 발매가 무사히 이루어진다. 시장에 판매를 시작하고서도 마음을 놓을 순 없다. 변경이 무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식약처에서 업무하며 최우선으로 고려하던 규정과 가이드라인과는 다른 범주의 고민이다.


가령, 가이드라인에 '제조단위를 10배 넘게 변경하는 것과 그 이하로 변경하는 것'에 제출자료의 차이가 있다. 약을 10만정 만들다가 100만정을 만든다고 하면 기존 공정과 그 관리방법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자료 제출 수준도 다르다. 일반 정제라면 10배를 초과하는 변경에 동등성시험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식이다.


심사자와 회사담당자 모두에게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의약품 허가 후 제조방법 변경 가이드라인'



예를 들면 이렇다. 라면 1개를 끓이는 것과 10개를 끓이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1개 끓일 때는 가장 작은 냄비를 쓰고 끓는 물에 3분이면 되지만, 10개를 끓이려면 곰솥을 꺼내와야 한다.  양도 다르고 물 끓는 시간, 라면 투입하고 익히는 시간도 다를 테고, 젓는 도구도 길어야 한다. 그래도 끓여낸 라면은 동일한 맛이어야 하니, 곰솥으로 10개 끓인 라면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는 것이다. 약을 만드는 공정도 마찬가지다. 규모가 커지면 공정 가동 조건이 많이 달라진다. (제조규모가 커야 원가절감이 많이 돼서 규모를 키우는 일이 잦다) 그러니 10배 넘는 변경이 있을 때는 비교용출 자료를 구비해서, 과연 동일한 약이 만들어졌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10배가 아니라 9배로의 변경은? 8배는? 그럼 많이 안 바뀌는 건가? 어디서부터 '많이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걸까? 심사하면서 규정을 처음 봤을 때 이런 식의 기본적인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심사 자료만 가지고는 세부적인 걸 다 알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시간도 많이 부족했기에 'Why'는 접어두고 얼른 주어진 규정에 맞춰 심사를 기간 내에 끝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제약회사에서 몇 달을 겪어 보니 정말 많은 변수가 품질에 영향을 미치고, 작은 변경이라도 자체 평가 없이 넘어가기 힘든 경우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주성분이 뭐냐에 따라, 첨가제에 따라, 기계 조건이 어떠냐에 따라 최종 제품이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시험생산을 정말 많이 한다) 더구나 심사자였을 때 내가 봤던 자료는 전부 '되는 케이스'에 대한 자료였지만, '안되는 케이스'가 그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 규정에 따라 만든 자료가 제품의 품질을 다 보증한다는 의미가 아닌 거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자료다. 모든 경우를 고려해 규정을 만들 수는 없으니, 이런 변수들을 고려하고도 가장 바깥의 바운더리에서 자료를 제출하도록 규정한 거다. 그러니 그 내부의 디테일함은 규정에서 요구하지 않더라도 제품을 가장 잘 아는 제약사가 챙겨야 하는 게 맞다. 수천, 수만가지 제품을 '의약품'이라는 카테고리로 아우르려다 보니 규정의 문구는 두루뭉술할 수 밖에 없고, 그 테두리는 실무의 훨씬 바깥을 감쌀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심사자 시절의 나는 저 바깥의 경우들을 다뤘던 거였다.

식약처에서 일하던 시절의 관점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과 같았다. 넓고 다양하게 보이는 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실무 요소들은 자세히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 제약회사 직원인 나는 현미경으로 보듯이 공장 실무를 본다.

현미경으로 보면 빨간 원 안의 각종 "실무 요소"가 확실하게 잘 보인다. 그리고 시야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우리 제품'에 특화된 현미경 안에 있다.



운이 좋은(?) 심사자라면, 현미경을 갖춘 채로 망원경을 갖게 되는 행운을 누릴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 반대라서 망원경으로 봤던 경험에 더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혹 지금의 경험을 가지고 심사 업무를 다시 하게 된다면, 망원경에다가 현미경의 시각을 더해 심사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십중팔구 이전보다 더 촘촘한 자료를 요구하게 될 거다. 과연 그런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의 얼마 간의 경험이 심사에서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궁금해지곤 한다.


내가 온전한 현미경과 망원경 둘 다를 가질 수 있을까. 아직 현미경으로 본 경험치가 턱없이 부족하니, 유의미한 시간과 경험을 축적하는 게 우선이다. 최근 몇 달 간 취준생 대상으로 강의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강의 마지막에 나는 항상, 입사 후 '유의미한 3년'을 보낼 것을 강조하곤 한다. 맘에 안 든다고 바로 그만두지 말라는 당부다. 어느 직장에서든 경험치를 쌓기에 '1년은 너무 짧고, 2년은 애매하고, 3년은 해봐야 알게 되는 것이 있다'라고 말이다. 이 말은 사실 나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나 또한 유의미한 3년이 지나야 비로소 현미경을 완성할 수 있겠지. 나만의 현미경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여기서 잘 지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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