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지혜 Jan 12. 2024

책임을 진다는 것 2

제대로 일해야 밥그릇을 지킨다.

(1편에 계속)


그런 생각 끝에는 결국 제조관리자 각자가 본분에 충실하게 일해야 약사 직능을 제대로 유지할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충분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제조소의 전반적인 GMP 실시상황을 책임지고 보증'하는 것이 약사 직능에 충실하면서  밥그릇도 지키길인 것이다. 단지 면허만 걸어놓고 제조소에서 어떤 행위를 하든(가짜 서류 포함)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월급받고 '싸인'만 한다는 생각으로 다녀선 안 다. 그러 제조소에서 하는 결정에 대해 발언권이 없는 게 당연하다. 힘들게 약사가 되어가지고 발언권도 없는 상태에서 불합리함을 하릴없이 목도하는 상황은 없어야 한다. 


그나저나 내 업무 이야기를 하면 예전 직장 동료들은 백이면 백, '그거 오래 할  못 된다'며 우려의 뜻을 표한다.  근거로 자신들이 그간 보아 온 '품질부서책임자 수난사'를 들려 준다. 품책 약사가 짊어지는 무거운 책임과, 재수없으면 겪을 지도 모를 법적인 수난(때론 형사처벌까지 가는) 개인이 감당하긴 어려운 게 맞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칫 '제조소에서 일어난 위법 행위에 대해 혼자 책임을 옴팡 뒤집어쓰는' 불명예를 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간 심난하기도 했다. 졸지에 백척간두 위에 자발적으로 올라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들었다. 나의 새 직무에 대한 우려 섞인 말을 들을 때마다, 이 백척간두가 이백 척 삼백 척으로 쭉쭉 늘어나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심난하고 속이 안 좋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입사한지  달만에 던지고 나가버릴 수는 다. 들은 풍월만 무성했을 뿐, 일단 똥인지 된장인지 내가 직접 충분히(!) 찍어먹어 보지 않았으니까.


이런 식의 수기 싸인도 하고 전자 서명도 한다.


사실 전국에 나 혼자만 품책 약사인 것도 아닌데. 초보이다 보니 더 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좀 위로가 되는 시간이 있었다. 예의 그 관리약사 연수교육에서, 차의과학대학교 손현순 교수의 <산업약사의 윤리>에 대한 교육 내용이 와 닿았다.


약사 직업의 존재 가치는, 약을 둘러싼 복잡한 세상구조를 냉철히 알고, 약에 대한 올바른 철학을 갖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약사가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은 공장에서 만든 상품이지만 아무렇게나 만들어지고 유통되어선 안 되고 또 아무렇게나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약을 둘러싼 모든 행위는 윤리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약사라고 하는 직업을 별도로 뒀고 면허증을 부여해 별도의 자격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하면 비도덕적인 행위를 강요하는 사장님하고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약사 면허를 걸고 일한다는 건, 높은 도덕성을 담보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사로서 일한다는 직업적 자부심을 좀 가져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약대생이었을 때 비슷한 교육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미 교육받은 내용이만, 진짜로 면허를 걸고 혼자 괜히 비장하던 참이라 교육 내용이 더욱 와 닿은 거다. 그동안은 '약사'로서 일하지 않았었는데, 공장에 와서 약사 면허를 걸고 보니 이제야 새삼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 거다. 역시 밥줄이 대롱대롱 있어야 생각도 깊어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한 달 전쯤에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약사님이 총무로 활동하는 '대충협회'('청의약품제조업체'의 줄임말이다. 대충 지은 이름이 아니다!) 모임나가보기도 했다. 의약품 품질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고 지내면서 정보도 교환하고 친목도 쌓는 모임이다. 나도 그 자리에 나가 신규 제조관리자로 인사하고, 누가 어디에 근무하는지도 소개받아 알게 됐다.


당연한 얘기지만 업무에 종사하는 약사가 나 혼자는 아니다.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다. 대충협회에서 만난 분들은 다들 '어떻게 하면 시스템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분들이었다. 소속된 회사는 다르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모임에 나가 직접 사람들을 만나니, 그냥 그 자체만으로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직 내가 모임에서 유의미한 발언을 하지는 않지만, 배우려는 자세로 매번 참석할 참이다.


한 가지 더. 우리 공장에서 같은 목표로 열심히 일하는 좋은 동료들도 있다. 나는 QA(Quality Assurance, 품질보증)팀 소속인데, 팀장님부터 가장 경력 낮은 직원들까지 모두가 진심을 다해 일한다. 혹여 완벽하지 않은 구석이 있어도, 구성원들이 조금씩 메우고 쌓는 느낌으로 일한다면 언젠가는 높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시스템의 한쪽 끝을 붙잡고 있는 나는, 같이 일하는 직원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괜한 부담감은 조금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장에 가끔 커피차도 온다.


아무튼 지금 나는 품질부서책임자로 일하면서 하루하루 싸인을 엄청 많이 한다. 싸인하기 전에 시간이 좀 걸려도 문서를 나름대로 검토하고 확인한다. 최종 승인 단계이기 때문에 완전히 처음부터 검토할 순 없어도 적어도 이 행위를 왜 했는지, 첨부 서류는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한다. 하다 보면 나무가 아닌 숲이 보이고, 개선할 점도 보이겠지 하면서.


그렇게 유의미한 경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공장에서 잘 버텨 볼 참이다. 약사 직능 수호든 개인의 커리어 성장이든 시간이 어느 정도 쌓여야만 가능하니까. 시간이 지난다고 직함에 붙은 '책임'의 무게가 결코 가벼워지지는 않겠지만, 그 무게에 상응하'의미' 또한 언젠가 반드시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책임을 진다는 것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