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진다는 것 1

나는 제약회사 품질부서책임자

by 유지혜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품질부서책임자'다. '책임자'라는 명칭만 들으면 마치 내가 공장 실무를 총괄하는 관리자처럼 들린다. 하지만 내가 우리 공장 조직에서 사람과 자원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맡은 건 아니다.


약사법에서는 '제조관리자'라는 명칭으로 의약품과 의약외품 제조업체마다 '품질부서책임자'와 '제조부서책임자'를 두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제조관리자'는 제조공정만 관리한다는 말이 아니라, 품질과 생산 각각을 관리하는 책임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이 제조관리자는 약사 면허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제조관리자는 제조부서책임자와 품질부서책임자로 나뉜다. 나는 품질부서책임자다.


제조관리'자'(者), 책임'자'(者)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약사 개인에게 책임을 부과한 느낌이 강하다. 책임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 내가 힘들게 딴 약사 면허가 공장에서 하는 행위에 따라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약사가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다고 모든 것을 책임지라니. 어쨌든 월급 받고 일하는 직원1 아닌가.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약사 입장에서 늘 즐거울 수만은 없다. 게다가 나는 품질부서책임자인데, 제조부서책임자보다 품질부서책임자의 책임 범위가 더 넓다.


총리령 별표1에서 정한 제조부서책임자(줄여서 '제책')와 품질부서책임자(줄여서 '품책')의 역할. 정해진 역할 갯수로만 봐서는 품책한테 월급 두 배 줘야 된다.


그래서 이 규정에 따라 일하는 품질부서책임자가 뭘 제일 많이 하느냐. 각종 GMP 문서에 최종 서명을 하는 일이다. 의약품 제조업체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계명인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에서는 문서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문서로 기준을 세우고, 모든 행위는 문서로 기록을 남겨 보존해야 한다.


GMP에 따라 약을 제조하는 과정과 시험하는 과정을 검증하여 표준화해서 문서로 만든다. 모든 제조와 시험이 있을 때마다 기록하고, 그 과정에서 일탈이 있으면 그 또한 기록을 남겨서 추적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모든 문서는 작성자와 검토자, 그리고 최종 승인하는 사람이 있는데, 품책인 내가 바로 그 최종 승인을 맡았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하루 일과는 대부분 많은 양의 문서를 최종 승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승인의 최고봉은 '출하 승인'이다. 약이 만들어져 시험이 끝났고 그 과정이 모두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으니, 공장을 떠나 이제 시장으로 가도록 하는 마지막 절차다. 약의 최종 소비자는 환자다. 까다롭게 만들었지만 언제 어디서 품질과 관련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게 내가 한 '최종 서명'의 의미다.




이렇게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하는 '약사'를 반드시 두어야 하니, 의약품 제조업체와 의약외품 제조업체에서는 약사를 채용하기 위해 애쓴다. 원래는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제조업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우르고 책임질 수 있는' 약사를 두라는 의미였겠지만, 어쨌든 '약사' 자격을 가졌다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갓 졸업한 신규 약사든, 나이 많이 드신 약사든 가리지 않고 채용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제조소는 공장이기 때문에 대부분 지방에 위치한다. 지방 중에서도 특히 외진 곳에 위치하거나 영세한 곳일수록 구인난은 더 심각하다고 한다.


제조관리자로서 '면허를 걸기 위해' 필수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장에 가 보니 연령대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고, 특히 백발이신 약사님들도 많았다.


약사 직업이 '좋다'고 하는 데에는 이렇게 제약사의 구인 수요가 많아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그나마도 약사를 구하지 못해 일각에서는 유럽에서 운영하는 제도인 QP(Qualified person)를 두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http://www.hi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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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화장품 제조관리자도 약사가 필요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위 기사처럼 의약품 제조관리자 또한 약사 말고 다른 경력자도 할 수 있게 하자고 이야기가 나온다. 업계에서 필요하다면 그 또한 도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약사로서 직능 범위가 축소돼가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약사 개인의 근무지와 근무 내용은 각자의 커리어 니즈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사실 대다수가 선호하는 것들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러다 약사 밥그릇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아 걱정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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