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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혜 Jan 11. 2024

책임을 진다는 것 1

나는 제약회사 품질부서책임자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품질부서책임자'다. '책임자'라는 명칭만 들으면  마치 내가 공장 실무를 총괄하는 관리자처럼 들린다. 하지만 내가 우리 공장 조직에서 사람과 자원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맡은 건 아니다.


약사법에서는 '제조관리자'라는 명칭으로 의약품과 의약외품 제조업체마다 '품질부서책임자'와 '제조부서책임자'를 두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제조관리자'는 제조공정만 관리한다는 말이 아니라, 품질과 생산 각각을 관리하는 책임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이 제조관리자는 약사 면허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제조관리자는 제조부서책임자와 품질부서책임자로 나뉜다. 나는 품질부서책임자다.


제조관리'자'(者), 책임'자'(者)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약사 개인에게 책임을 부과한 느낌이 강하다. 책임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 내가 힘들게 딴 약사 면허가 공장에서 하는 행위에 따라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약사가 무슨 용 빼는 재주가 있다고 모든 것을 책임지라니. 어쨌든 월급 받고 일하는 직원1 아닌가.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약사 입장에서 늘 즐거울 수만은 없다. 게다가 나는 품질부서책임자인데, 제조부서책임자보다 품질부서책임자의 책임 범위가 더 넓다.


총리령 별표1에서 정한 제조부서책임자(줄여서 '제책')와 품질부서책임자(줄여서 '품책')의 역할. 정해진 역할 갯수로만 봐서는 품책한테 월급 두 배 줘야 된다.


그래서 이 규정에 따라 일하는 품질부서책임자가 뭘 제일 많이 하느냐. 각종 GMP 문서에 최종 서명을 하는 일이다. 의약품 제조업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계명인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에서는 문서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 문서로 기준을 세우고, 모든 행위는 문서로 기록을 남겨 보존해야 한다.


GMP에 따라 약을 제조하는 과정과 시험하는 과정을 검증하여 표준화해서 문서로 만든다. 모든 제조와 시험이 있을 때마다 기록하고, 그 과정에서 일탈이 있으면 그 또한 기록을 남겨서 추적할 수 있게 다. 그리고 모든 문서는 작성자와 검토자, 그리고 최종 승인하는 사람이 있는데, 품책인 내가 바로 그 최종 승인을 맡았다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하루 일과는 대부분 많은 양의 문서를 최종 승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승인의 최고봉은 '출하 승인'이다. 약이 만들어져 시험이 끝났고 그 과정이 모두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으니, 공장을 떠나 이제 시장으로 가도록 하는 마지막 절차다. 약의 최종 소비자는 환자다. 까다롭게 만들었지만 언제 어디서 품질과 관련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게 내가 한 '최종 서명'의 의미다.




이렇게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하는 '약사'를 반드시 두어야 하니, 의약품 제조업체와 의약외품 제조업체에서는 약사를 채용하기 위해 애쓴다. 원래는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제조업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우르고 책임질 수 있는' 약사를 두라는 의미였겠지만, 어쨌든 '약사' 자격을 가졌다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갓 졸업한 신규 약사든, 나이 많이 드신 약사든 가리지 않고 채용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제조소는 공장이기 때문에 대부분 지방에 위치한다. 지방 중에서도 특히 외진 곳에 위치하거나 영세한 곳일수록 구인난은 더 심각하다고 한다.


제조관리자로서 '면허를 걸기 위해' 필수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장에 가 보니 연령대 스펙트럼이 매우 넓었고, 특히 백발이신 약사님들도 많았다.


약사 직업이 '좋다'고 하는 데에는 이렇게 제약사의 구인 수요가 많아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그나마도 약사를 구하지 못해 일각에서는 유럽에서 운영하는 제도인 QP(Qualified person)를 두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http://www.hi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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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화장품 제조관리자도 약사가 필요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위 기사처럼 의약품 제조관리자 또한 약사 말고 다른 경력자도 할 수 있게 하자고 이야기가 나온다. 업계에서 필요하다면 그 또한 도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약사로서 직능 범위가 축소돼가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약사 개인의 근무지와 근무 내용은 각자의 커리어 니즈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사실 대다수가 선호하는 것들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러다 약사 밥그릇이 점점 작아지는  같아 걱정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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