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를 고민하는 약사들이 한번쯤 고려해 봤으면 하는 것
약에 대한 전문성을 지닌 약사가 필요한 분야는 많습니다. 규제를 다루는 공적 영역, 즉 식품의약품안전처에도 약사가 많이 필요합니다. 해마다 수많은 약사들이 배출되지만, 식약처 공직 약사로 진로를 희망하는 약사는 별로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공직의 특성상 보수적인 조직문화, 현실적이지 않은 보수, 그리고 지방 근무(=충북 오송)라는 점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https://www.dailypharm.com/Users/News/NewsView.html?ID=312392
(약무직 응시자 부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단 약무직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약사 면허를 가진 신규 '연구직' 공무원도 부족합니다.)
저는 약사로서 한 번쯤은 식약처에서 일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식약처에 몸담았던 '졸업생'으로서 말이죠. 물론 현실적인 조건들을 조금 감수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 기사를 통해 약사 부족의 현실과 이유는 잘 알려져 있으니, 약사가 식약처 근무를 한번쯤은 고려해봤으면 하는 이유를 제 경험에 비추어 세 가지로 이야기해 볼게요.
약과 관련된 모든 일, 즉 약사(藥事)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과 규정의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식약처에서는 약과 관련된 법과 규정을 다루며 일합니다. 업무 자체가 곧 법과 규정의 '해석과 적용'이죠.
식약처는 의약품의 허가, 심사, 안전성 정보수집, 그리고 사후관리까지 담당하는 국내 유일한 조직입니다. 약의 개발과 탄생부터 시장에서 철수하기까지 그야말로 '알파와 오메가'를 관리합니다.
이런 업무는 반드시 약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해야 하죠. 약대에서 배웠던 전공 지식이 실제 제품이나 임상으로 구현될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약사들이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순한 행정 업무가 아니라, 약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로 판단해 방향을 정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요한 영역에 약사가 계속 부족하다? 언젠가는 약사의 목소리를 공적 영역에서 내지 못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 약사(藥事)를 약사(藥師)가 정하지 못하는 것이죠. ‘약사직능 수호’는 약국, 병원, 제약회사만의 과제가 아닙니다. 정책과 규제가 만들어지는 자리에도 약사들의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약사직능 수호가 필요한 건 알겠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라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커리어를 바라보는 관점, 워라밸의 중요도는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하지만 제약회사로의 커리어를 꿈꾸고 있다면 이쪽(?)도 한 번쯤 생각해 봐 주세요. 분명 장점이 있습니다.
식약처에서 일하다 보면 나름의 시야로 제약산업의 흐름을 읽게 됩니다. 제품이 개발되고 허가를 받고, 유통되고 사후관리되는 과정이 모두 이곳을 거쳐가거든요. 심사부서에선 실제 허가 자료를 깊이 살피고, 지방청에선 현장으로 지도 점검을 나가고, 본부에선 정책의 큰 방향을 정합니다.
물론 내가 몸담고 일하는 부서는 한 곳이죠. 하지만 다른 부서들과 수도 없이 협업할 일이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요즘 어떤 분야에 이슈가 많은지, 어떤 모습으로 산업의 방향이 흘러가는지가 보입니다.
이렇게 업무 흐름 속에서 규제와 산업, 연구와 현실 사이의 접점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면 나중에 제약업계로 이직하더라도 좀 다른 시야에서 업무를 풀 수 있습니다. 마치 ‘출제자의 의도를 아는 수험생’처럼 규제기관의 의도를 아는 상태에서 말이죠. 규정의 배경과 행간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실제 제약 실무에서 큰 강점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식약처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국제 협력과 소통입니다. 해외 규제기관과의 회의, 국제 조화된 가이드라인 제개정 활동 등 국제적으로 우리나라의 상황과 입장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이 매우 빈번합니다.
조금만 연차가 쌓이면, 이런 일을 맡아 우리나라를 대표해 의견을 조율하고 설명하는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내가 뭐라고!하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맡으면 다 하게 됩니다. 선배들도 다 그랬거든요. ^^) 식약처에 근무한다는 사실만으로 말이죠.
제약산업은 점점 더 글로벌해지고 있고, 규제기관인 식약처는 우리나라 회사들의 글로벌 진출을 선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글로벌 단위의 업무 경험은 단순히 공무원으로서가 아니라, 약사로서 시야를 확장시켜주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공무원 급여는 제약회사나 개국약사에 비해 낮은 편입니다. 처우가 이러니 맡은 업무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도 종종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식약처 업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분명 존재합니다. '경험'의 측면에서 말이죠.
국가가 약을 어떻게 보고 다루는지를 실무적으로 이해하는 경험은 민간에서는 얻기 어렵습니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어디서든 ‘시야가 다른 약사’가 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 약사님들에게 조심스레 하고 싶은 말은, '처음 몇 년은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도전적인 길이 불안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해주고 싶네요.
식약처엔 약사의 시선이 필요하고, 당신의 판단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들이 있습니다.
딱 3년만 도전해 보세요. 요즘 평생 직장은 없다잖아요. 그리고 나서 나와 맞는 길인지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3년이 지난 후에 더 큰 사명감을 느껴 정년까지 30년을 더 근무할 수도 있고, 나름의 큰 시야를 가지고 나와 다른 분야로 방향 전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초반 3년의 도전이 앞으로의 커리어에 훨씬 더 큰 방향성을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쯤은 고려해 보셨으면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약사인 당신이 제약회사 공장에서 일해봐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역시나 약사 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직무 경험일 수 있는 공장 약사에 대해서요. (공장에도 약사가 많이 필요하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