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읽어선 절대 안 되는 문서들
식약처 의약품심사부에 근무하던 시절, QbD(Quality by Design, 설계기반 품질관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해외 문서를 참고해 국내 가이드라인을 제정한 경험 덕분이었죠. 따져보니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네요.
당시 QbD는 국내외에서 매우 주목받는 이슈였고,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대응해야 한다며 (“베트남은 벌써 도입했다” 등) 빠르게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마침 일본 PMDA에서 발표한 QbD 적용 예시 문서가 있었죠. 그 문서에는 RTRT를 비롯해 QTPP, CQA, CMA, Design Space 등 QbD에서 다루는 주요 개념들이 ‘Sakura Tablet’이라는 가상의 정제를 예시로 하여 담겨 있었습니다.
문서는 내용은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막상 읽어 보니 첫 페이지부터 넘기기 쉽지 않았습니다. 영문이었고 개념도 생소한 데다 내용이 방대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부를 목적으로 읽으려 했다면, “읽어봐야지”라는 결심만 하고 미루다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저는 그 문서를 가지고 국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업무는 팔 할이 번역이었죠.
당시는 지금처럼 번역 프로그램이 발달하지 않았고, 저 역시 내용과 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많은 시간을 들인 기억이 납니다. 몇 달에 걸쳐 문장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조합하고, 되뇌고, 수정을 반복하며 작업했습니다. 그렇게 공과 시간을 많이 들였지만 결과물은 솔직히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 번역투가 남아 있는 수십 장짜리 문서 한 부일 뿐이었으니까요.
(당시엔 “이걸 누가 읽겠나” 싶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QbD에 관심 있는 업체라면 누군가 한 번쯤은 봤을 것 같네요.)
그렇게 문서 한 부를 제 언어로 바꿔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QbD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자연스러운 국문으로 옮기기 위한 작업 자체가 저만의 정독이자 숙독이었죠. 나름대로 고민하며 보낸 축적의 시간이 준 선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무식한) 축적의 힘’을 믿습니다. 별다른 요령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는 방식 말이죠. 시간이 들고 좀 돌아가는 것 같아도 그런 방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처음 보는 생소한 개념들은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어느 정도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축적의 힘'을 보려면 한두 번으론 안 됩니다. 적어도 열 번은 해야 합니다. 특히 저는 새로운 걸 배우는 데 오래 걸리는 ‘slow learner’이기도 하고요. 그동안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읽을 걸 그냥 열 번 읽는다고 생각하며 반복합니다. 시간을 들여서 말이죠.
그렇게 하다 보면, 처음에는 잘 모르겠던 것티 세 번째쯤에는 개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일곱 번째엔 내용이 어떤지 '감'이 오기 시작하죠. 열 번째까지는 그렇게 '감'의 레벨을 올려 갑니다. 여기서 더 발전하려면, 그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이해도가 멱살잡혀 끌려올라갑니다.
돌이켜 보면 심사부 시절엔 그런 목적의 야근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가이드라인 과제를 맡았을 때, '제 수준에서 먼저 이해도를 올리기 위한 야근'을 했죠.
업체에 와서도 마찬가지네요. 이젠 가이드라인을 새로 만드는 입장은 아니고, 이미 제정된 가이드라인을 우리 회사 시스템에 도입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담당자의 이해도가 높아야 하죠.
요즘 가장 머리를 싸매고 있는 주제는 'CCS(Contamination Control Strategy, 오염 관리 전략)'입니다. 무균 제제에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오염원을 위험도에 따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문서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가 처음부터 초안을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전임자가 남긴 방대한 초안이 있는 상태에서 착수했죠.
처음엔 간단한 검토라고 생각했지만, 곧 이 작업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문서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초안에선 전체적으로 논리가 너무 흩어져 있었고, 실제와 동떨어진 내용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문서 내에 검토자의 눈을 흐리는 지점이 여럿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초안을 고쳐 '유효한 문서'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혹은 틀린 내용을 발견할 때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경험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네요. 틀만 잡혀 있는 정도라, 거의 처음부터 검토해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해결 방법은 하나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중심을 잡고, 그 안에서 해결책을 뽑아 내는 것이죠.
다행히 요즘엔 GPT라는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가끔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하는데, 자주 쓰다 보니 이젠 녀석 말을 30%는 걸러 듣는 요령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검증을 거쳐 논리를 찾아가며 어떻게 수정할지 정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좋은 도구가 있어도 여전히 마무리는 담당자의 몫입니다. GPT를 괴롭혀 가며(?) 여전히 반복적인 읽기를 계속해야 할 판입니다. 정답도 없으니 '이 정도면 됐다'하는 수준이 될 때까지 말이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장 너무 높은 완성도를 목표로 하진 않고 있고, 우리에게는 내년, 내후년도 있으니까요. 아직 아무도 정답을 모르는 시행 초기라는 것, 꾸준히 이 문서를 들여다볼 시간이 있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예전에 QbD 가이드라인 만들 때처럼 지금도 묵묵히 CCS를 축적해 나가야겠습니다.
(아직 갈 길이 좀 멀어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 상태지만, 한숨만 쉬거나 절망하지 않고 말이죠.)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길고 어려운 문서를 반복해 읽는 게 제 업(業)인가 봅니다. 돈 받고 하는 일에 큰 즐거움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뭔가' 쌓여가는 것을 느끼며 퇴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뿌듯함이 남습니다. 그 기분이 썩 괜찮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