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 끄기'의 기술, 첫 번째

큰 고민을 작게 만들어 주는 '백 년전 이야기'의 힘

by 유지혜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머릿속 스위치가 도통 꺼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그날 했던 업무, 동료와 나눈 대화, 그리고 지금 풀고 있는 문제까지 뒤섞여 머리속이 계속 돌아갑니다. 몸은 퇴근했지만 머리는 퇴근하지 못한 날이죠.


직장 경력이 쌓일수록 이런 경험을 주기적으로 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잠도 쉬이 들지 못하니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럴 때 제가 쓰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소설 처방'입니다. 특히 저는 토종 사투리의 '말 맛'이 살아 있는 대하소설을 좋아합니다. <토지>나 <혼불>, <아리랑>, <태백산맥>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풍경을 넓게 그려낸 소설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권수가 많다 보니 인물과 사건을 긴 호흡으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 점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저는 어느 새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습니다.


요즘 저는 <혼불>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현대와는 확실히 다릅니다. 먼저 죽은 남편을 따라 젊은 나이에 자살을 택한 여인을 기리며 열녀비를 세우고, 그를 본받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양반집 종부의 모습, 대를 이을 장손의 안위를 위해 온 집안이 애를 태우는 모습, 그러면서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수완을 발휘하는 서릿발 같은 기상을 가진 여성들까지. 그 시대에도 인생사는 참 다양합니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지금 제가 겪는 문제들이 한없이 작게 느껴집니다. (GMP 온습도 일탈 이슈 같은 것에 하루를 다 바치고 온 날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백 년 전 사람들의 고민과 삶을 들여다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고민은 잠시 옆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또 대하소설을 읽다 보면 느끼는 말 맛의 재미도 있습니다. 글자로만 읽으면 알아보기 어려운 사투리들이 소리내어 읽으면 의외로 착 붙습니다. 입에 굴려보다 보면, 우리말이 이렇게도 맛있게 변주될 수 있구나 싶습니다. 그 또한 대하소설 읽기의 재미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 시대를 살앗던 사람들의 속내와 시대정신이 툭툭 스며들기도 합니다. 소설 속 유식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당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그 시절의 공기를 같이 마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국내외 정치판이 복잡하지만, 그시절 또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정세를 대하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걱정을 했었을까요.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정보가 적고 소식도 느리게 전해졌으니 걱정하다가 숨돌릴 틈은 지금보다는 많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저는 오늘도 자기 전에 작은 등을 밝히고 <혼불>을 집어듭니다. 흥미롭게 읽다가도 어느 순간엔 졸다가 푹 꺾어진 고개를 힘겹게 들어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잠들 수 있다면 스위치 끄기 성공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AI시대, 첨단바이오 시대이지만, 오래 전 이야기를 읽으면 정신없었던 하루를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 주말엔 계곡에서 탁족하며 소설을 읽는 귀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저도 모르게 백년 전 사람이 돼 있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