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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관찰자 Oct 24. 2021

길 위의 인연들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오가기에 같은 승객들을 만나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승객과 자연스레 친근한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I.


남편은 아이든 어른이든 모든 승객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다. 처음에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매번 이렇게 인사했는데 코로나19 이후로는 목례만 한다.


70대 가까운 어느 아주머니가 멀리서 남편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주머니가 승차할 때 남편이 목례하자 경상도 억양의 그 아주머니가 어찌나 밝고 사근사근하게 인사하는지 남편도 기분이 좋아져 다시 인사했다.

"아유, 안녕하세요.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제가 다 활기 돋습니다."

아주머니가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그날 불쾌한 일을 당한지라 친절한 승객과 말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나왔다.


그날 오전, 남편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해 있는 동안 승객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타고 내렸다. 버스가 정류장을 떠나 1차선으로 접어들어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 대기하고 있는데, 정류장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스물 서너살 정도의 여자가 도로를 가로질러 와 앞문을 마구 두드렸다. 남편이 문을 열었더니 냉큼 올라타 따졌다.

"아니, 그냥 가면 어떡해요?"

"그냥 가다니요? 여기 계신 승객들 다 아무 문제 없이 탔는데 핸드폰만 보느라 혼자서 안 탔잖아요?"

"뭐라고요? 지금 나한테 그러는 거예욧? 내 맘이에요!"

여자는 소리지르더니 뒤로 가버렸다. 어린 여자애한테 수모 당하면서 어찌나 화가 나고 열불이 나던지 남편은 그 이후 계속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 아주머니는 얘기를 듣더니

"그래요? 그 기집애 나한테 걸렸어야 했는데. 내가 있었으면 확 무안을 줬을텐데!"

하는 말로 남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


"아까 아주머니께서 제 버스 보고 손 흔들어주셨는데, 저희는 그런 승객이 정말 좋아요. 그러면 최대한 그분이 편하시게 바로 앞까지 바싹 대드립니다."

기사 입장에서는 멀리서부터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해주면 차를 어디에 세워야 하는지 알고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천천히 진입해 안전하게 바로 그 승객 앞에 세워줄 수 있는 것이다.


얼마 후 남편은 정류장에서 손을 흔드는 그 아주머니를 또 만났다. 버스가 바로 자신 앞에 딱 서자 아주머니가 놀라서 주춤 뒤로 물러섰는데 남편이 문을 열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놀라지 마세요."

"아, 난 누군가 했네. 우리 멋진 기사님을 여기서 뵙네요!"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손 흔들어주시면 최대한 편하게 앞에 대드린다고."


활동적이고 수시로 외출을 하는 그 아주머니를 남편은 자주 만났다.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아주머니와 남편은 서로 친해졌다. 둘이서 얘기하다 보니 당연히 관심이 큰 건강 문제에 대한 고민도 나누고, 그러다 남편이 아는 한의사를 소개해주기까지 했다.


그 당시 남편이 모는 마을버스는 종점이 대로변이라 길가에 차를 대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출발했다. 아주머니는 밥먹을 시간이 부족해 잠시 후에 그냥 출발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다려보라며 편의점에서 김밥과 우유를 사다주기도 하고, 커피를 사갖고 타기도 했다. 새벽 1시에 집에 들어온 남편의 가방에서 자색 양파라든지 감이라든지 호박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한두개씩 나오는 걸 보면 얼마나 재밌었는지 모른다. 아주머니가 장바구니에 들어있던 야채를 나눠주었던 것이다.


II.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탈 버스가 언제 오나 신경쓰기보다는 핸드폰에만 코를 박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버스를 놓치고서는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민원을 제기하곤 한다. 하지만 나이드신 분들은 그렇지 않으니 버스가 오면 탈 액션을 취해 기사가 자신의 승객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남편은 그럴 경우 고맙기도 해서 무릎도 성치 않은 분들이 도로에 내렸다가 높은 계단에 다시 힘들게 올라야 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인도에 바싹 대드린다.


한 할머니가 버스를 타며 남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바싹 대줘서 감사해요."

"어유, 우리 할머니가 제 버스 타려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바싹 대드려야지요."

그 할머니는 노인복지관으로 매일 수영을 다녔는데 남편 버스를 탈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꼭 남편에게 가방 속 사탕을 주었는데, 남편은 사탕을 잘 먹지 않으니 늘  바구니에 사탕이 쌓였다. 남편은 그래서 그 사탕을 버스 탈 때마다 인사 잘하는 아이들에게 주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복지관 프로그램이 폐지되면서 할머니는 더이상 수영하러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남편은 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III.


남편은 늘 목례를 하는데  항상 밝게 인사하며 타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매번 그 아주머니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니 남편도 코로나 이전처럼 그 아주머니에게만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게 되었다. 퇴근할 때 만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안녕하세요, 아침저녁으로 타네!"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안면을 튼 이후로는 매일 탈 때마다 남편에게 사과즙을 한 포씩 주곤 했다. 남편이 사양해도 꼭 사과즙을 주니 계속 받기만 하기 미안해 남편도 그 아주머니에게 과자를 주기도 했다.


IV.


어느 눈 쌓인 겨울날, 승객들이 다 타서 떠나려는데 저 멀리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막 뛰어오고 있었다. 정류장에는 바로 이 한 대밖에 없으니 이 버스가 목적인 게 맞는데, 저 미끄러운 길을 달려오는 아주머니를 두고 매정하게 갈 수가 없어 남편은 기다렸다.

"저렇게 힘들게 뛰어오시는데 그냥 가면 안 되겠죠? 저 분 오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하고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바쁜 출퇴근시간이 아니고 승객도 별로 없어 그 정도는 누구든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아주머니가 헐떡이며 버스에 올라 감사를 전하자 남편은 말했다.

"눈도 쌓여있는데 안 다치고 제차 타러 이렇게 오신 게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합니다. 다른 승객분들이 기다려주셨으니 승객들께도 감사하다고 하시죠."

아주머니는 승객들에게 인사하고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바로 다음 정류장이 위의 첫번째 이야기에 나온 싸가지 없는 승객이 탄 곳이었는데, 남편은 워낙 열불이 났던지라 그곳만 지나면 매번 그 생각이 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에게 그때의 일을 이야기했더니 아주머니가 위로를 해주었다. 회차지점에서 내린 아주머니는 과자를 사다가 남편에게 갖다 주기까지 했다.


V.


저 앞에서 남매로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어찌나 팔을 위아래로 엄청 흔들며 온몸으로 버스를 향해 신호를 하는지, 그 모습을 멀리서부터 본 남편은 너무나 귀엽고 예뻐서 웃음이 났다. 남편은 남매들 바로 앞에 차를 세워주고 큰 소리로 환영을 했다.


"아유, 우리 꼬마 승객들, 안녕! 저기부터 우리 꼬마 승객들 손 흔들어서 너무 좋았어요. 손 흔드는 거 누가 알려줬어요?"

"엄마가요. 엄마가 버스 오면 꼭 손 흔들라고 했어요."

"맞아요, 엄마가 정말 훌륭하신 분이네! 내가 탈 버스가 오면 그렇게 손을 흔들어야 해요. 앞으로도 꼭 그렇게 해줘요!"

"네!"


남편은 그 남매가 너무 예뻐서 사탕이라도 주고 싶었는데 마침 사탕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이 밝고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내렸고, 남편도 큰소리로 응답을 해주었지만 뭔가 주지 못한 게 마음에 내내 남았다. 남편은 사탕과 과자를 준비해두고 그 아이들이 또 타기를 기다렸지만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일들이 다 마을버스에서 일어난 일이다. 남편이 운전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코로나19가 터지는 바람에 예상과는 달리 마을버스에서 오래 있기도 했지만, 그리고 남편이 일반 시내버스로 옮긴지 몇달 안 되기도 했지만, 마을버스 승객과 시내버스 승객은 확연히 다르다.


도심지를 돌기는 했어도 남편이 몰던 마을버스는 1시간 10분이면 종점으로 돌아와 생활반경이 넓지 않은 연령대가 많이 타게 된다. 그리고 요금도 200원이 싸니 승객들은 일부러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린다. 출퇴근 시간에 주로 타는 젊은 사람들은 어차피 버스 한번으로 목적지에 가기보다는 전철 환승용으로 타게 되니 요금의 이점을 누릴 수가 없어 마을버스든 시내버스든 신경쓰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나이도 있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주변에 관심이 많으니 남편이 몰던 마을버스에서는 기사와 자주 보는 승객의 관계가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까지 가는 3시간 반짜리 장거리 노선이어서 승객들도 상대적으로 바쁠 수밖에 없다.


사실 인간관계를 바라고 운전을 시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하지만 힘들게 일하는 와중에 기쁨을 주는 것도 사람이고,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주는 것도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사실은 그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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