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나와서 뭐 해?

태평양 건너 시작한 두 번째 커리어

by Dearlee J
건축과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고 환영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진로이기도 했다.



29살, 태평양을 건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상업용 부동산 업계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약 3년쯤 되었을 무렵,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

회사에서는 나름 인정받으며 일하고 있었고, 하루하루 보람도 느끼고 있었다. 사회생활과 동시에 실무 경험을 통해 자아실현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불만 없는, 말 그대로 ‘잘 굴러가는 쳇바퀴’ 같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행 제안이 들어왔다. 기간은 1년 반.
미국에 있는 소규모 건설회사에서 실무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고민이 시작됐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는 한국 사회에서 결코 가볍지 않았고, 회사 생활도 어느덧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애매한 기간이었다.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한 유학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름 있는 대기업도 아닌, 미국의 소규모 건설회사에서 실무 경험을 쌓는 것이 전부였다. 돌아왔을 때 다시 자리를 잡는 데 리스크가 따를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미국행이었다.


나를 설득하기 위해 꺼내놓은 이유들

제안은 받았지만 직무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단지 “Estimator”라는 직무 이름만 들었을 뿐, 실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무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이유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스물아홉이지만, 아직 내 발목을 한국 땅에만 묶어야 할 이유는 없다.
1년 반은 인생 전체로 보면 긴 시간이 아니다.
돌아와서 경력직으로 다시 도전할 만큼의 경험은 충분히 쌓고 올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 건설업계를 직접 경험해 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이 중에서 마지막 이유가 가장 컸다.

“이걸 안 해보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다.”


그렇게 두 번째 커리어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건설회사에서의 첫 역할

일하게 된 회사는 종합건설사(General Contractor)라기보다는, 지붕과 외벽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외장 Sub-contractor였다. (지금은 성장해서 종합건설사로 전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맡은 직무는 Estimator. 한국어로 하면 견적 및 수주 업무에 해당한다.


한국 건설사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어서 양국의 견적 프로세스를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미국에서 경험한 Estimator의 역할은 비교적 명확했다.


Estimator

Estimator의 핵심 업무는 두 가지다. 프로젝트 견적 산출과 수주.


수주를 하기 위해서는 견적을 산출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견적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펼쳐보는 것은 프로젝트의 도면이다. 이 부분은 첫 직장보다 오히려 건축학도로서의 역량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건축학과를 다니며 기본적인 도면은 직접 구상하고 그려봤기 때문에, 도면을 펼쳐보는 일이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에 도면을 보며 실무를 한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즐거웠다.


프로젝트 도면과 더불어 견적을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펼쳐보는 자료가 하나 더 있다. CSI MasterFormat이다.


CSI MasterFormat은 미국 건축·건설 업계에서 표준처럼 사용되는 비용 산출 가이드라인으로, 약 50개의 Division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Division은 콘크리트, 철골, 전기, 인테리어, 외장 등 건설의 특정 분야를 체계적으로 다룬다. 말 그대로 건설 비용 산출의 백과사전 같은 존재다.


우리 회사는 외장 전문이었고, 내가 주로 다뤘던 Division은 Division 7이었다. 외장재, 단열재, 방수 자재 등 건물 외피와 관련된 모든 스펙이 여기에 포함된다.


견적 산출의 시작

견적을 시작하면 먼저 오너사나 종합건설사로부터 도면과 스펙을 전달받는다.


이를 Bluebeam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올려 스케일을 설정한다. 그다음부터는 수량 산출을 위해 본격적인 Take-off 작업을 시작한다. 입면과 단면을 방향별로 돌려가며, 도면에 명시된 각 외장재의 면적과 수량을 하나하나 산출한다. 수량 산출이 끝나면 Division 7을 뒤져가며 각 자재의 Spec을 다시 확인한다.

어떤 단열재인지: 두께, 주재료 등
어떤 색상의 외장재인지
면적은 얼마나 되는지

외장 위치에 따라 색상별, 자재 종류별로 정리한 뒤 해당 스펙에 맞는 제조업체에 전화나 이메일로 견적을 요청한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제조사 세일즈팀에서 먼저 수량 산출과 가격 제안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입찰, 그리고 눈치 싸움

수량 산출과 자재 가격 협의가 끝나면 본격적인 입찰 단계로 넘어간다.


입찰의 핵심은 단순하다.
내가 제출한 견적 패키지가 선택받을 수 있을 만큼 경쟁력 있는가.


자재비는 제조사에서 정해진 경우가 많아 크게 조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은 인건비, 공사 일정, 자재 생산 및 납기 일정 등을 조합해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숫자를 조정한다. 조금이라도 입찰가를 낮추기 위해 공정 순서를 바꿔보고, 자재 납기일, 인력투입일 등 퍼즐을 맞추듯 고민한다. 말 그대로 ‘짱구를 굴리는’ 구간이다.


모든 계산이 끝나면 0을 하나 더 붙이진 않았는지, 0을 하나 빼먹진 않았는지 여러 번 검토한 뒤 패키지를 제출한다.


입찰 방식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는 절대적이다.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정확히 제출할 것. 이를 지키지 못하면 이유 불문 자동 탈락이다. 정부 공사의 경우, 정해진 시간까지 봉투에 봉인된 입찰 서류를 직접 지정 장소에 제출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면과 숫자를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

한국 대형 건설사들의 견적·수주 업무와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지만, 큰 틀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수주’라는 직무는 어느 건설사에나 존재하고, 그만큼 건축과를 졸업한 후 비교적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다만 미국에서의 수주 업무는 ‘Estimator’라는 명확한 직분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Estimator들끼리의 커뮤니티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도 꽤 신기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점은, Estimator의 역할이 단순히 입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주 이후에도 현장에 나가 있는 Project Manager들과 Estimator는 상시로 소통한다. 현재 공사가 수주 당시 산출했던 수량과 가격에 맞게 진행되고 있는지, 자재 사용과 비용이 계획에서 벗어나고 있지는 않은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한다. 처음에는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투입되는 직무라고만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전 과정에 걸쳐 Estimator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수주한 프로젝트의 자재, 수량, 그리고 가격.

이 모든 것을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모니터링하는 것.


내가 경험한 미국에서의 Estimator 역할이었다. 그리고 건축과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고 환영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진로이기도 했다.

작가의 이전글건축과 나와서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