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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19. 2021

달리고 얻은 평화

2018. 08. 30. 처음으로 10km 코스를 달린 이후 사흘 내내 가을을 맞이하려는 장맛비가 내렸다. 이틀간 다섯 번의 안전재난문자가 날아들 정도로 폭우 수준으로. 덕분에 집 앞에서 서울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지류천 산책로에 내려가 볼 수가 없었다. 어제 퇴근길에 내려다 차창밖으로 살짝 보이던 지류천은 황톳물에 모든 것이 잠겨 있었다. 사흘 내내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움직 하게 꿈틀거렸고, 간혹 미세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비가 그치고 다시 달리면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호시탐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출근길에 비가 살짝 가늘어지길래, 내심 오랜만에 반가운 친구 온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가볍게 운전을 한 것 같다. 비는 시간에, 특히 퇴근 무렵에 거무스레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비가 완전히 그치기를, 아니 가늘어지기를 기다린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그 자체의 설렘이 그냥 좋다. 분명, 달리기의 묘미 중 하나일 게다.     




  집은 모든 창문이 꼭꼭 닫혀 있다. 며칠간 비가 오는 이유이기도 하도, 천둥 번개 소리에 열린 창문 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구 짖어대는 반려견이 혼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비릿한 냄새가 훅하고 달려들었다. 그 녀석의 오줌과 똥 냄새에 후텁지근함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거실 에어컨 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연결된 베란다 창문도. 이 집 저 집 둘러보다, 이제 살았다 하며 비집어 들어오듯,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뒤쪽 베란다와 아이들 방의 창문도 모두 열었다.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은 긴장감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오늘은 꼭 10km를, 한 번도 쉬지 않고, 입으로 호흡하지도 않고 달려야겠다. 꼭!‘     


  어느새 아내는 식탁 위를 싹 치우고 싱크대로 몸을 옮겨놓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컵, 접시, 그룻, 음식물 찌꺼기들이 아마 아내를 더 예민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혼자 했다. 그러면서 나는 아내 눈치를 본다. 아니, 사실 눈치라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지금 해도 되나 하는 스스로 체크하는 버릇이다. 그러는 사이, 아내가 먼저 물었다.      


“운동 갈 거야?”     


기회다. 얼른 대답했다.     


“그럼, 얼른 갔다 올게.”     


“.......”     


 대답 대신 싱크대 주변을 수돗물을 틀어 정리하는 아내를 보며,   


“설거지, 청소하지 마. 내가 얼른 달리고 와서 할게. 쉬어”     


 대답, 아니 허락 대신 아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귀 넘어 들리는 내용으로는 서너 달 전, 같은 동 옆라인 1층으로 이사 온 집이다. 아내와 내가 적극 찬성하기도 했고, 4학년, 2학년의 어린 형제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1층을 그 집이 찾던 중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더 어릴 때 가족들끼리 여행, 캠핑을 같이 여러 번 다녀 본 사이라 위아래 집으로 지내자는 의견에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층 엄마는 휴직 중이다. 아내와는 발령 동기. 나이는 서너 살 어리다.       


“응. 나야. 저녁 아직 전이지? 저녁 먹기 전에 산책하자고. 뭐 물어볼 거도 있고 해서. 괜찮아? "    


  괜찮단다. 다행이다.      


“나, 1층이랑 산책 다녀올 테니까. 운동 갔다 와서 내가 혹시 더 늦으면 집 청소 좀 해줘.”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달리는 내용을 기록하는 어플을 실행하고, 새로 구입한 땀 흘림 방지용 헤드밴드도 착용한다. 새로운 아이템은 마음가짐을 새롭게 만든다. 그래서 마음건강에 좋다. 도전하고픈 마음이 자란다. 틈틈이 만들어 둔 러닝, 러닝 2 음악 폴더도 실행시킨다. 오늘은 러닝 2를 플레이했다. 20곡으로 평균 1시간 러닝타임이다. 세 번째 구입한 – 아내는 모를 거다, 아마 – 블루투스는 딱 달리기에 적합한, 끝판왕 느낌이다. 일단, 귀에서 흔들리지 않고, 떨어지지 않고, 음질도 괜찮다. 3만 원이면 가성비 최고다.


  아내가 산책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먼저 집을 나섰다. 1층 출입문에서 어플의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아파트 안 인도를 100여 미터 달려, 후문을 통과해 우측 인도로 달린다. 그러다 하천 옆 산책로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시작이다. 어제까지도 시뻘건 흙탕물에 잠겨 있던 산책로는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천이 흐르는 방향으로 산책로 주변 수풀이 가지런히 누워있다. 풀밭 사이사이에는 떠내려온 생활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다. 산책로 주변에 있는 기둥들에는 마치 풀어헤친 머리카락처럼 가로, 세로로 풀과 나무들이 걸려 있다.      






 몇 분 달리면 나오는 짧은 다리 위에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토사가 진흙 형태로 엉거 붙어 있다. 거기서 10여분쯤 더 달리는 데도 여전히 다리 움직임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사흘 만에 다시 달리다 보니, 몸이 무겁다. 정확하게 다리가, 허벅지 뒷부분, 햄스프링이 당긴다.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굵은 나뭇가지 한토막이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약 2km 지점을 지나니 사타구니 왼쪽의 안쪽 부분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소변감을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몽우리 진 종기가 들어 있는 느낌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것 말고는 문제가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호흡이 안정적이다. 들숨과 날숨이 반복적이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날숨에 오른손이 반동하듯 움직인다. 매번 느끼는 부분이지만, 달리기가 혹시 체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흡이 안정적이면, 팔 동작이 가벼워지면, 무거운 다리 움직임은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생각이 사라진다. 생각이 사라지면 몇 분까지, 어디까지란 목표의식도 사라진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지 않는다. 오로지 내 몸, 내 호흡에 집중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고 나면 처음부터 함께 달리던 산책로 옆 하천의 물소리가 들린다. 흙탕물의 일렁거림이 느껴진다. 마주오는 사람의 표정이 보인다. 주인 옆에서 나란히 바지런하게 종강 거리는 강아지의 눈빛과도 인사를 나눈다. 블루투스에서 흘러들어오는 비트에 맞춰 심장이 움직이고, 가사를 곱씹을 여유가 생긴다. 지금은 뉴오더의 ‘블루 먼데이’가 작은 스피커를 경쾌하게 두들기고 있다.     


 얼굴은 후끈거리지만, 새로 구입한 헤드밴드 덕분에 얼굴로 땀이 흐르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의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반환점에 도달했다. 반환점은 5km쯤에 있는 삼거리 다리이다. 직진하면 더 달리는 거고, 왼쪽으로 돌면 맞은 편, 오른쪽으로 돌면 다른 산책로로 이어진다. 나는 이 다리를 기점으로 다시 달려온 반대편 산책로로 유턴하여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반환점 다리를 돌자마자 윗옷을 벗어, 왼손에 들었다.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는 러닝용 언더웨어만 입는다. 이건, 일종의 나만의 다짐 의식이다. 옷을 들고, 더워진 몸을 식히면서 ‘이제 절반은 넘었다. 멈추지 말자. 걷지 말자. 계속 뛰자’는 다짐.     


  반환점 다리를 얼마 지나지 않은, 교각 아래 자전거 도로포장 부분이 자동차 보닛 만하게 떨어져 나와 있다. 그리고 그 크기만큼 웅덩이가 파여 물이 고여 있다. 사흘간 내린 비 때문일 거다. 그런데 그런 웅덩이보다 더 위험한 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턱이다. 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포장이 되어 있어서 미세한 틈이 벌어져 있다. 그런데 그 높낮이가 1~2cm만 나도, 보폭이 우연하게 그 틈, 아니 턱에 닿아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칫하면 발목에 무리가 갈 수 있다. 작은 흔들림에도 지친 다리에 갑자기 힘이 쭈욱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달리는 내내 고글 속 시선은 전방보다는 3~4m 미터 앞 바닥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산책로 출발점 맞은편에 거의 도착했는데, 달리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천물이 많아져서 하천을 가로지를 수 있도록 놓아둔 커다란 돌계단이 물에 잠겨 있었다. 원래는 그 돌계단을 가로질러 출발점으로 돌아가 제방을 올라간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달려 올라온 쪽 제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도로 위 다리를 건너 아파트 단지 인도를 통해 후문까지 달렸다. 몸이 최상으로 가벼워졌다. 완전하진 않지만, 다리의 근육도 어느 정도 뭉침 없이 제자리에서 움직여주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바로 후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후문 옆에 있는 사잇길로 들어가 우리 아파트 동을 한 바퀴 안는 듯 돌았다. 달리는 거리를 좀 더 늘리기 위해서다. 출발했던 1층 출입구 앞에 도착하는데, 맞은편에서 아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의찬네 들렸다 나오는 길이었다.      


“산책, 지금까지 한 거야?. 한참 했네”


“응”     


  집에 올라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샤워하지도 않고 바로 청소를 시작했다. 먼지를 털고, 물걸레 청소기를 두 번 돌리고, 양쪽 화장실 세면대, 바닥, 변기를 세제를 사용해 거품 청소를 했다. 뜨거운 몸이, 기분 좋게 가벼웠다.      


“코~코~”     


 반려견을 부르며 침대에서 놀아 주고 있는 아내의 목소리가 가볍다. 산책 덕분이다, 분명. 운동을, 움직이는 걸 즐기지 않는 아내가 1층 식구들이 이사 온 이후 가끔 산책을 나간다. 그리고 나에게도 산책같이 나가자는 이야기를 두 번이나 먼저 했다. 그래서 1층 식구들이 무척이나 고맙다.      





 얼른 청소를 끝내고 샤워를 사는 사이, 아내는 컴퓨터를 켜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내일 있을 대토론회를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주제는 ‘평화로운 학교’였다.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모여 10개 팀으로 나눠, 실천과제를 도출해내는 행사이다. 7월에 예정되어 있던 것인데, 그래서 그때 오늘처럼 비슷한 준비를 했고, 의견을 나눴었는데 내일도 연기되었단다. 나는 다시 아내 옆에 앉았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고, 파워포인트 파일 수정을 도와 주웠다. 30여분 정도. 일을 다 마칠 무렵 아내가 다시 질문을 했다.   


“학교가 왜 평화로워야 하는지를 좀 더 쉽게 청중들한테 전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멘트가 뭐가 있을까?”  


“글쎄, 뭐가 좋을까?”     


“아이들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잖아. 그런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어떨까?”     


“어떤 거?”


“예전에 어떤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더라고.”     


“그게 뭐야?”     


“정확한 문장은 기억에 나지 않는데, 그 뉘앙스는 ‘두려움은 배움과 공존할 수 없다’는 거였거든?”  


“그래? 아~ 그거 좋은데, 아주 좋아.”     


“무엇보다 아주 중요한 건 말이야 ‘두려운 만큼 삐딱해진다’라는 사실이야.”     


“오우~ 그것도 너무 좋은데. 아. 진작에 이런 멋진 말을 해줬어야지. 그래야 고민을 덜 했지.”     


 아내의 목소리가 매우 가볍고 밝았다.       


“뭐야? 내가 또 잘못한 거야?”     


“그럼.”     


“이런!”     


  여러 사람 앞에 서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아내가, 부장으로 이런저런 대표성을 띠고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하고, 의견을 모으고, 방향을 조정하는 게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여전히 있다. 그러면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동시에.      


“역시 능력자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칭찬이다. 아내한테.  오늘은 달리기와 산책이 만나, 작은 행복을 만들었다. 그 행복으로 아내는 평화의 해답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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