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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19. 2021

내 다리가?

  강원도 정선. 삼시 세끼라는 예능 프로 덕분에 청정 지역으로 많이 알려진 그곳.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탄광촌. 난 서울에서 그곳으로 초3 때 전학을 갔다. 아니 왔다. 이제 막 친해진 석관동 친구들을 떠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촌으로 가야 한다는 말에 나는 꽤 여러 달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내가 전학 온 그곳은 사십여 년 전에는 잘 나가던 탄광촌이었다. 지나다니는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광산지역. 최근에는 카지노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가 보다.

  전학을 미루고 미루다 3학년이 다 끝나가는 11월 어느 날. 강릉행 무궁화호에서 내렸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새벽이어서 더 추웠고, 낯설어서 너무 휑했고, 불빛이 없어서 사방이 온통 시커맸다. 플랫폼에 띄엄띄엄 켜져 있던 희미한 가로등 불빛의 역사를 빠져나오자 나는 시커먼 어둠 속으로, 세상 속으로 훅하고 빨려 들어갔다. 나의 초등학교 절반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운동장 오른쪽에 길쭉하게 서 있던 단층짜리 일본식 마루바닥 교실. 학교 속에 또 다른 학교처럼 유난히도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었다. 유관순 초상화가 창가 벽 가운데에서 내려다보던 그 교실에서 전학 온 첫해 겨울을 났다. 적어도 그 이전 기억 속에는 없었던 겨울을. 교실에서는 나무난로를 피웠다. 주번일 때는 아침 일찍 학교 야적장으로 달려가서 그날 쓸 나무를 주워와야 했다. 그러다 친구들이 하나 둘 생기고,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직원들 숙소로 사용되던 아파트 뒤 야산에 광솔을 주으러 기어 올라가곤 했다. 광솔은 난로에 불을 붙일 때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송진 옹이가 있고 약간의 석탄가루가 묻어 있어 타닥거리는, 착화탄 같은 나무다.

  4학년이 되면서 5층짜리 본관 건물로 옮겨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교 대표 운동선수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되었던 건지 과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종목은 핸드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종목이었다. 그러다 5학년 때는 농구부가 되었고. 학교에 그 두 종목의 팀이 있었는지, 아니면 없어지면서 새로 생긴 건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내가 운동선수가 된 이유는 체육 선생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운동장에서 잘 달리고 또래보다 키가 컸다는 이유로.




  그 때문에 반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수업을 들을 때 나는 거의 매일 운동장을 뛰었다. 열몇 바퀴, 스물몇 바퀴를. 그러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학교 뒷산까지 왕복으로 또 뛰었다. 하루 운동을 시작하는 루틴이었던 것 같다. 어렴풋한 기억에 뒷산으로 뛰는 경우는 아마 감독 선생님의 체벌 같은 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돌아온 운동장에서는 흙먼지를 날리고 마시며 감독 선생님의 고함소리를 휘슬소리 삼아 연습 게임을 통해 시합용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흰 우유, 커피 우유, 보름달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것 같다.

  왼쪽 허벅지는 핸드볼에서 농구로 종목이 바뀐, 5학년 3월 무렵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보통은 저녁을 먹고 이른 시간에 골아떨어지면 아침에 퇴근하시는 아버지 목소리에 깨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밤부터는 다리가 아파서 잠을 깨기 시작했다. 허벅지에서 시작된 통증은 왼쪽 다리 전체로 퍼져 나갔다. 소리를 지르면서 울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통증의 기억은 어제저녁처럼 생생하다. 허벅지가 배겨서 왼쪽으로 돌아누울 수 조차 없었다. 날카로운 칼로 살과 뼈를 반복해서 긋는 것 같았다. 끝이 날카로운 굵은 철사 다발로 마구마구 찔러대는 것 같았다. 드릴로 허벅지 뼈에 구멍을 내는 듯한 통증이었다.  




  거의 매일 밤바다 반복되는 통증은 이제 낮에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통증 원인을 찾기 위해 참 많은 애를 쓰셨다. 나의 기억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큰돈을 들여 굿도 하셨단다. 한의원에서 부황도, 침 시술도 여러 차례 했었다고 한다. 그 시골에서 큰 도시까지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니셨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그런데 나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아팠다. 그리고 여러 번. 통증과 통증 사이에 잠깐 잠이 들었을 때는 자주 나를 짓누르는 검은 그림자. 팔과 다리가 꽁꽁 묶여 방바닥에 못으로 박혀 있었다. 의식은 또렷한 데, 식은땀은 비 오듯이 흐르는 데, 몸은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게 자주 가위에 눌렸다. 지금도 나를 덮치고 있던 묵직한 무게감과 내 빰을 흔들면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땀이 범벅이 된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괜찮냐고 소리치는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어떻게 그 병원에 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와 어머니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어두침침한 병원 복도 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른 병원에서 처럼 비슷한 몇 가지 검사를 했다. 한참을 기다렸다. 대머리에 주변머리 몇 가닥은 흰색이었던, 인상 좋은 의사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절룩거리면서 어머니와 같이 들어갔다.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의사한테, 어머니한테. 의사는 미간에 힘을 주면서 결과를 설명했다. 설명하는 동안에 일부러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다. 의사가 설명하는 어떤 말도 귀에 박히지 않았다. 딱, 두 단어만 빼고. '골수염', '다리 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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