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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21. 2021

친구야, 같이 배구하고 싶다

  나는 그렇게 '골수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통증이 일어난 지 꽤 오래만에. 5학년 여름방학이 되기 얼마 전이었다. 아주 아주 큰 병원에 입원을 했다.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왔던 그 코너처럼. 환자를 배드에 태우고 계속 달리면서 개그를 하던. 나는 입원하자마자 바로 수술을 했단다. 상황이 급했단다. 7시간이 넘는 수술이었단다. 가끔 병원 드라마를 보면 그 짧은 기억이 되살아난다. 으스스하게 지독히도 추웠던 수술실. 엄청나게 많은 회색빛 장비들. 빨갛고 노랗고 투명한 수많은 줄들. 천장에 매달려 내려다보는 여러 개의 불빛. 눈이 부셔 쳐다보지 못하는데 눈이 스르르 감겼다. 파란 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뭐라고 주고받는 말소리가 아주 먼 저 언덕 너머에서 들렸다. 눈꺼풀이 수술실을 덮었다.




  얼마나 잤을까. 나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는 묵직한 모래주머니가 열댓 개는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칭칭 감아놓은 붕대는 여러 곳이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그 부분은 까실하고 축축하고 딱딱했다. 붕대가 감싸고 있는 수술 부위는 미끄덩 거리면서 뭉클거렸다. 치료를 할 때는 당연히 붕대를 풀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살에 눌러 붙어 있던 꾸둑한 붕대가 살점을 뜯어내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소리도 질렀고, 고래고래 울기도 많이 했다.

  병실은 운동장처럼 넓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진단을 받고, 나보다 먼저 수술을 하고, 재발을 해서 재수술을 한 어른 환자들이 있었다. 나처럼 어린 이는 하나도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서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골수, 그러니까 뼈 안에 염증이 생긴 거란다. 아버지가 치킨 뼈를 떠올리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그 새까만 부분. 지금 중학생인 딸이 어릴 때부터 쪽쪽 빨아먹던 그 부분. 나는 그 병원에서 몇 달을 입원해 있었다. 정확한 기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름 전에 입원을 했는데, 학교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많이 추웠다. 친구들 사이에는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었나 보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던 그 병원. 내 다리 수술을 해 준 그 의사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막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까지 정기적으로 검진을 했다. 그때 이미 주변머리가 모두 백발로 변해 있던 그분, 방. 덕. 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지 꽤 오래되었다. 성함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고마움 때문만이 아니다. 친절했고, 다정다감했고, 용기를 줬기 때문이다. 마지막 검진을 갔을 때였다. 하얗고 까만 엑스레이를 보시면서 처음으로 이야기하셨다. 한두 달만 더 늦게 자신이 나를 봤더라면, 왼쪽 다리를 허벅지 깊숙이 절단했어야 했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되지 않아서 본인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이 부분이 예전보다 더 두툼해졌다고. 이제 걱정하지 말고, 사회생활 신나게 하라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많이 하고, 열심히 걸으라고. 옆에서 같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나처럼.

  


 

   어제 A한테서 전화가 왔다. 서너 잔을 기분 좋게 마신 목소리였다. 우리 몸에서 목소리가 가장 늦게 늙는다, 는 나만의 확신을 가수 이문세 다음으로 갖게 하는 친구이다. A는 초등, 아니 국민학교 6학년 때 전학을 왔다. 내가 막 다리 통증에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을 무렵. 처음 A를 봤을 때 엄청나게 큰 키, 붉그레한 얼굴. 과장 전혀 안 하고 학부모인 줄 알았다. 나중에 친해지고 보니까 나보다 한살이 더 많았다. 추석 밑이라 전화했다면서, 불콰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서열을 따져 들었다. 자기가 나보다는 분명 나이가 더 많다고. 그래서 내가 형이라고 불러줄까 했다. 그랬더니 이제는 싫단다. 그러다 갑자기 막 마흔을 넘자마자 죽은 친구 B 이야기를 했다. B와 우리 둘은 중학생 때 단짝이었다. 넓은 운동장 한켠의 배구장은 언제나 우리들 차지였다. B가 리시브를 하면, 내가 A에게 토스를 해줬다. 그러면 A는 그 큰 키로, 덩치로 멋진 스파이크를 네트 넘어 내려꽂곤 했다. 우리와 상대할 팀은 없었다. 나는 움직이는 게 너무너무 좋았다. 초등학교 때 운동선수로 움직이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르면 행복해졌다. 땀은 으스스한 느낌도 없었다. 알코올 냄새도 나지 않았다.




  A가 B를 만나기로 약속한 어느 날. A는 영등포에서 의정부까지 전철을 타고 왔었다고 했다. 하지만 B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B의 부고가 날아왔다고.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B가 약속을 만들면서 미처 나에게 전하지 못하고 쓰러진 거다.  A는 서울에서 전기 관련 사업체를 한다. 직원 셋에게 명절휴가비를 조금뿐이 못 챙겨줬다고 미안해하는, 착한 자영업자이다. 이 글은 A의 전화 덕분이다. 나는 몇 해 전까지 내 무의식 속에 있던, 트라우마를 잊고 살았다. 그걸 잊고 사는데 큰 도움이 된 게 달리기이고. 달리기 선수가 아니라, 달리는 이. 그래서 더욱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컨디션에 맞춰 밖에 나가 서 있다는 사실이, 잊고 있던 그 시간 속에서는, 분명 큰 기적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친구야 송편은 먹었니. 예전처럼 리시브하고, 토스 올리고, 강 스파이크!  각자 있는 곳에서 열심히 받고, 올리고, 때리면서 잘 살자. 그래서 나는 비가 내리는 오늘도 달리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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