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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Dec 21. 2023

고마워요 허릿병

[나명작]6

[ 우리는 그저 살기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왜 사는지 묻고 따지고 싶어 산책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 합니다 . 이래 저래도 이유는 분명하지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사는 건가에 대한 물음에 자기 자신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타인의 안녕도 챙기면서라고 대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덧 열흘뒤면 2023년이 각자의 갤러리 속 한 장면, 한 장면으로 잠깁니다. 한 해 동안 내가 '오늘도 안녕'하게 살아내는데 도움을 준 모든 것(표상뿐만 아니라 물자체까지도)에 대한 인사를 해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늦더라도 열흘 안에는 그 고마움을 고백해야겠습니다.

_________2023년에게 보내는 공개고백_1 ]



며칠 전 겨울비가 내리던 날, 잠실에 다녀왔습니다. 고3 아이들이 하루 마음껏 놀 수 있도록 한 날이었습니다. 덕분에 남매들 어릴 적 가본 후 놀이동산은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오픈 시간, 출석체크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여유 있게 돌아보고, 아이들을 기다리려고. 그런데 1시간 전이었는데도 벌써 정문게이트 바닥에는 초등학생, 중학생 무리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대리석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비가 계속 내린다는 예보가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쉽지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10시에 시작된 아이들 일정(?)은 말 그대로 사람 구경이었습니다. 비가 계속 내려서 야외 놀이기구는 아예 운행을 하지 않아 더욱 그랬습니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접으면서 지나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아이는 5시간 동안 2개의 놀이기구만 탈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놀이동산의 본질은 놀이기구가 아니라는 것을 그 아이는 표정으로, 그 옆에 있는 친구들은 괴성으로 대답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물이 안된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표현을 하지 못하고, 안 해서 그렇지. 그런 아이들 옆에서 오후 늦게까지 서성(!) 이는 게 그날 하루의 임무였습니다.


그 임무를 맡은 동료들은 모두 13명. 삼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 퇴근 시간 무렵까지 모두들 흩어졌다 모였다 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대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함께 움직여야 했습니다. 아이들의 상황도 공유하고, 사진도 찍고, 틈새 회의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십 대는 물론 삼십 대도 지쳐가는 모습이 여실했습니다. 모여서 있을 때 각자의 몸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많은 이들이 한쪽 방향으로 몸이 기울어진 자세를 취합니다(흔히 짝다리 짚는다 하지요. 참, 그런데 이 표현을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르더군요. 거의 다 짝다리여서 그런가 봅니다)  


또 많은 이들은 조금이라도 걸터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엉덩이를 가져다 앉고 기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동료들은 저에게 집중하더군요. 여기 앉으세요, 아, 맞다. 네, 맞습니다. 어디 가나 하루 종일 내내 11자로 서서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서 있는 상태로 뒤꿈치 들기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하나도 안 피곤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실제 그렇게 많이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야외 활동을 할 때는 일부러 잠을 일찍 더 많이 자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허릿병 덕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가만히 올해를 돌아봅니다. 그랬네요. 23년 동안 근무하던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옮기면서 허릿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게 눈치(?) 보이게 허릿병 재활을 시작하면서 높낮이 조절이 자동으로 되는 책상을 2개 구입했습니다. 하나는 새벽에 읽고 쓰는 나만의 공간에, 하나는 무실에. 의료용 의자도 하나 구입했습니다. 이렇게 갖춰 놓고 나서부터는 거의 서서 업무를 봤습니다. 낮 시간 동안 근무를 하면서 앉는 시간은 도시락 먹는 시간을 포함한 30분 남짓입니다. 보통 7시간 이상 서 있습니다. 그 시간이 벌써 320일이 넘어갑니다.


아, 그랬습니다. 3월 2일 학교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매일 서서 글을 썼습니다. 지금처럼 새벽에도 일어나 서서 읽고, 서서 씁니다. 다 허릿병 덕분입니다. 물론 서서 있으면 무릎이 허리에 양보를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왼쪽 무릎이 오른쪽 무릎보다 약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더욱 무릎 근육을 강하게 하는 스트레칭 동작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럭저럭 좋아졌습니다. 달리기를 하다가 허릿병이 생겼다는데 다시 달리기를 하는 게 허릿병에 정말 좋다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 덕분에 다시 조금씩 달리고 있는 것도 다 허릿병 덕분이네요.   


올해도 저도, 여러분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일이 언제나 계기가 됩니다. 무너지는 계기, 다시 살아나는 계기. 그 경계에서 우리는 항상 갈피를 잡았다 놓쳤다 합니다. 일상이라는 말속으로 숨어들면서. 하지만 그러는 사이 우리의 내면에는 새로운 신념이 들어섭니다. 옳은 신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그런데 '오늘도 안녕하세요'라는 물보다 더 흔하게 쓰는 표현 속에, 또 그 정도 연하게 섞여 있는 정도의 신념입니다. 우리 자신과 남에게 도움은 안되더라도, 해는 되지 않는 정도의 신념말입니다.


그러다 그 신념이 좀 더 세련되고 다듬어지고, 다듬어지고, 다듬어지면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지켜보는 타인들이 먼저 인정하게 되는 신념이 되기도 합니다. 아름답고 완전한 이성으로 발전하는 것이지요. 그럴 상태가 되면 우리의 마음에 제대로 도장에 새겨진 이름처럼 각인이 됩니다. 마음에 각인된 신념으로 다시 '오늘도 안녕하세요'라고 건네는 인사는 표현은 전과 같아도 달라진 인사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집니다. 진심으로 걱정이나 탈 없이,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평화로운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인류애의 표현으로.


올해는 담당의가 휴직을 권고할 정도로 몸 상태가 절정이었습니다. (달리기로 인한)허릿병에 (유전적인 원인으로 인한) 빌리루빈 수치도 정상의 3배 넘게 치솟아 이런저런 모임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몸이 먼저 꺼려하는 게 느껴진 건 올해가 처음입니다. T가 티 내지 못하고 잠행하듯이 지내는 건 스스로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쓰고, 읽는 것에 대한 내 마음도, 태도도 절정이 되어 갑니다. 여전히 나를 위해 쓸 것인가, 남을 위해 쓸 것인가를 오락가락 하지만 그건 아직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글은, 쓰는 행위는 그 자체가 이미 위대하니까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올해를 빛낸 가장 훌륭한 작품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고백하려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나의 유일한 탁월함은 꾸준함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한 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할 정도라고 느끼게 해 준 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멈추기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멈출까 봐 멈추기 전에 두려워하는 시기가 더 두렵다는 것을 알게 해 준 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다 허릿병 덕분입니다. 고마워요, 2023년!



내년에도 정말 모두 잘 '오늘도 우리 같이 안녕'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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