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명작] 13
지난해 여름. 이사를 하면서 아드님이 렌트했다는 현지 집을 가봤다. 2층짜리 목조 주택 1층. 차고옆 자그마 공간에 있는 원룸. 화장실과 샤워실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 위도가 60도가 넘는 곳이지만 태평양 서쪽에 있어 연중 온화, 하다고 기후 교과서에 쓰여 있는 곳이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다. 익숙한 파란색 이온 음료 광고지. 뒷 배경이 된 바닷가 언덕 위 하얀 집, 파란 지붕. 바로 이탈리이아의 대표적인 휴양지 산토리니다.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따듯한 곳이지만 거기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겨울은 우리처럼 겨울이다. 영상 5~7도 정도이지만, 춥지는 않지만 으스스한 기온. 그게 관광객은 잘 느끼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기후인 거다. 그래서 거기에 맞게 난방 시스템이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물며 북반구 중위도 위쪽, 그러니까 위도상 40-60도 정도에 위치한 미국 북부나 캐나다 지역은 우리의 겨울 이상일 수밖에.
이런 기후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대표적인 난방 시스템이 바로 난로다. 몽테뉴가 15세기 중반 남부 독일을 여행하면서 만난 상자 모양의 철제 난로. 개방형 벽난로를 보고 자란 프랑스인들이 혐오하기까지 했다는 폐쇄형 난로다. 불꽃이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열효율은 더 좋다. 사방을 둘러싼 철판에서 열이 동서남북, 위아래로 다 퍼져 나가기 때문에. 우리 어릴 적 교실 한가운데에 도시락통을 올려놓던 그런 난로의 원리처럼.
이 폐쇄형 난로가 변형되어 우리에게까지 와닿은 게 보일러 순환방식을 이용한 라디에이터다. 군 복무할 때 잠들 때마다 발바닥 밑에서 딱, 따닥하며 잘 마른 장작 터지 듯한 소리를 내던 시스템. 남매들 어릴 때 유독 추웠던 바깥으로 돌출된 공간에 있던 화장실 변기가 얼지 말라고 켜 놓았던 난방 기구. 지금의 매립형 보일러와 다르게 일반적으로 배관이 노출되어 있다. 아드님이 지금 살고 있는 목조 주택의 난방 시스템이다.
며칠 전 아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드님과 나눈 대화 화면을 보여줬다. 북태평양의 뜨겁고 찬란한 여름가운데에 입주한 아드님. 올 겨울은 모든 게 혼자, 처음 하는 것들 투성이다. 사는 것도 혼자 처음, 직접 밥을 해 먹는 것도 혼자 처음, 장 보는 것도 혼자 처음, 자기 공간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것도 처음. 정해진 생활비에 어릴 때부터 돈을 잘 쓰지 않는 성격에 더해져 그랬지 싶다.
화장실에서 주방으로 이어진 돌출된 배관이 이번 한파에 얼은 게 아니라, 터져 버렸단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수리전문가를 예약하는데도 한참, 예약하고 오는데도 한참, 와서 공사하는 것도 한참. 그렇게 지금 3주가 흘러가고 있는가 보다. 아드님의 가장 큰 걱정은 돈이다. 우리처럼. 그런데 그 견적이 예상보다 훨씬 더 커질 건가 보다. 그곳에서 처음 살아보니 그 동네의 시세(?)를 여기저기 물어본 후 아드님이 아내한테 보낸 톡에는 1000-1500불 예상된다고.
입주할 여름에 인상 좋아 보인 이탈리안 호스트한테 언제쯤부터는 외출할 때 화장실과 싱크대 수도꼭지는 조금씩 열어 놓고 다니라는 조언을 들었단다. 그래서 그렇게 물은 틀어 놓고 다녔는데, 화장실 안쪽에 있던 전기 라디에이터는 켜놓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고. 이 부분이다. 호스트와 아드님의 상식 논쟁이. 우리 동네에서는 이런 날씨에 라디에이터를 켜놓는 건 상식이다, 나는 이 동네에서 겨울을 처음 겪다 보니 전기값 때문에 이 부분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아드님한테 현지에서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처형과 그 가족의 의견은 전적으로 현지의 상식에서 벗어난 아드님 실수. 그곳에서 나고 자란 캐네디언 여자 친구와 그 가족의 의견은 호스트가 추워지는 날씨를 보면서 고지를 했어야 하는 의무 위반. 그 사이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결정하는 데 오래 걸리는 스타일인 아드님. 특히, 비용과 관련된 문제라면 더더욱 그런데 골치가 이만저만 아닌듯 하다.
하지만 직선거리가 8,200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우리보다 호스트와 위아래 집으로 살고 있는 아드님이 해결해야 할 부분이겠다. 아내와 나는 톡으로 이러자 저러자 해서도 안된다고 합의했다. 스물 하나니까. 아드님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여전히 한국적이다. 앞으로도 수개월 얼굴 보며 살아야 하는 사이인데.... 이 말속에는 아내와 나의 비용 부담이 문제가 아니라면, 자기 실수로 인정하고 빨리 해결하고 마음이 가득한 듯이 읽힌다. 아드님 스타일대로.
그러나 단박에 성인이 된 자식 앞에 부모가 나서 돈으로 해결해주는 건 또 아내와 나의 스타일이 아니다. 물론 비용도 문제이고. 프랑스인 몽테뉴는 17개월동안 말을 타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나라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한 사회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한 것을, 다른 사회는 정상적인 것으로 부담없이 받아들인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옮겨간 그곳에서 혼자 살면서 인생을 여행중인 아드님. 이제 막 6개월을 넘긴 아드님이 몽테뉴가 여행에서 얻은 지혜로 지금 상황을 잘 해결하기를 빌어 본다. 무엇보다 자기 생각을 잘 전달해서 스스로 지키고 싶어 하는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비용면에서 나와 아내의 부담을 줄이는 두 가지를 야만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해결해 보는 큰 경험을 할 수 있기를. 아마, 돈주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눈에는 야만스럽거나, 충격적으로 비치는 관습이나 관행이 있게 마련이다 <수상록>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