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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17. 2021

일머리

우리 자주 이야기를 하지요. 

일이라는 게 원래 한꺼번에 몰리는 법이라고. 

바로 요즘이 그렇습니다. 

공적인 업무와 사적인 의욕이 겹칩니다. 

사적인 게 공적인 것과 연결되기 때문에 더 바쁩니다. 

뇌 회로에 계속 불이 들어온 켜져 있는 컴퓨터 같습니다. 


여러 개의 일(프로그램)이 동시에 실행됩니다. 

이럴 때는 일머리가 작동됩니다.  

일처리 순서를 결정해야 합니다. 

반백살이 두어 달 남은, 일요일 아침입니다.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안 해도 되는 일의 순서를 정합니다. 

이럴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일머리 작동에.


그런데, 해야 할까 일, 하고 싶은 건가 일, 하지 않아도 될까 일, 안 해도 될까 일의 경우에는

순서가 뒤죽박죽 됩니다. 해도 안 한 듯합니다. 일머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가는 데 지나고 보면 아쉬움에 늘어지게 됩니다. 

다행히 오늘의 결론도 예전과 같이 평화롭습니다. 

시기적으로 급한 일(밥벌이 준비)에 하고 싶은 일(읽고 쓰고 운동하고)이 밀려야지요.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그것 때문에 혼자 징징거리냐 하고 스스로 타박하는 위로를 해 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지켜본 남매가 가끔 묻습니다. 다시 10대로, 20대로, 군대로, 30대로, 40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항상 'NEVER'였습니다. 아니, 아니라 결코!

이십여년이 넘는 동안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머리가 좋다, 아이디어가 좋다, 일 참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목을 받고, 신이 나고, 의욕이 넘쳐 살아온 그 시간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욕심'때문에 '자기 파괴'의 순간들이 에어컨 필터에 낀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있는 같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하는 일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지요. '1만 시간의 법칙' 뭐 이런 것들이 그런 의미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일상은 그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밥벌이 과정에서는 그 시간에 예정에 없던 일이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크건 작건 말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내 주변에서도 일은 항상 일어납니다. 그것도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서 달려듭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별 일' 없는 게, 지루하게 밋밋한 일상이 가장 큰 생산력을 가진, 행복한 시간인 이유입니다. 


일머리는 일을 '잘하는' 머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어지거나 만들어낸 일을 '배분'하면서, 스트레스 줄이면서 해내는 능력입니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빨리 하고 완벽해도 스스로 배분하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 그대로 받아 안으면 남는 건 독한 인상, 예민한 성격, 나빠진 건강이 세트일 뿐입니다. 


며칠전부터 교과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세계를 들여다보다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책입니다, 발행만 하지 않을 뿐. 매년 나를 만나는 아이들이 좀 더 편안하고,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게 새로 만들어 제시합니다. 이십년가까이 해오고 있는, 나만의 소중한 의식입니다. 내일 공식적인 인사이동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 나이에도, 이 경력에도 익숙함에서 멀어진다는 두려움과 낯설움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여 아침 한기를 잘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오늘처럼 일요일 아침에는 물한잔 마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씁니다. 하지만 며칠전부터는 글의 내용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다행입니다. 브작님(브런치 작가님)들의 알림을 아침마다 만날 수 있어서. 더욱 더 다행입니다. 이름을 내걸고 많은 어린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다른 글쓰기를 순탄하게 해내고 있으니까요. 목적이 뚜렷한 또 다른 일상여행에 대한 글쓰기입니다. 


그러는 틈틈이 5분, 10분 스쿼트를 합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서성거리면서 하체를 느껴봅니다. 그 사이에 아내와 함께 원두 한잔을 즐깁니다. 라디오 어플로 클래식을 들으면서. 컴퓨터를 식혀주는 자그마한 팬(fan)이 내 머리속에서 열심히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그러면서 일머리를 천천히, 다시 작동시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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