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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12. 2021

아내라는 정신적 작용

메이플리지, 밴쿠버 자가격리 4일 차

2020. 01. 17(일)

밴쿠버에서의 자가격리 4일 차이다. 4일 만에 처음으로 소파에서 잠을 잤더니 몸이 찌뿌둥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캐나다 이민국에서. 내용은 대충 이렇다. '오늘이 자가격리 4일 차다. 기침, 발열 같은 증상이 있나'라고. 그리고는 그 밑에 이런저런 내용을 어기면 벌금이 최소 만 달러 최고 75만 달러, 징역 6개월이라고 쓰여 있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낮에, 중간중간 계속 잠이 온다. 아직도 시차적응이 안되었나 싶다가, 문득 한국에서 부족했던 잠이 갇힌 공간에서 폭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은 뭐 먹을까?라고 생각이 들다 갑자기 한국에서 즐겨 봤던 삼시 세 끼라는 프로그램이 떠오른다. 남자 셋이서 일정 기간 동안 외딴곳에 모여서 삼시 세끼 밥을 해 먹는 과정을 담은 예능 프로. 물론 지금의 내 상황과는 많이 다르지만, 나는 메뉴 선정에 초점을 맞춰 연결고리가 보였다.


가끔은 내 의견을 말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대부분의 주말 삼시 세끼, 평일 두 끼 메뉴는 아내 덕분에 결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밴쿠버에 와서 깨달았다. '우리 뭐 먹을까?' '저녁 메뉴는 뭘로 할까?' '야채곱창 어때?'라고 할 때 가끔은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 혼자 '꽁'하곤 했지만.


근데, 삼시 세끼 메뉴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다. 생각보다, 아니 실제로 많은 상상력과 응용력, 실전 감각에 따른 결정력이 요구된다. 지금 냉장고에 어떤 식재료가 있고, A와 B의 조합 여부가 어떻고, 외부의 영향 정도에 따라 메뉴를 결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질리지 않아야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느 끼니나 맛과 분위기, 적절한 호흡이 따라줘야 한다. 그래야 같이 먹는 식구들이 호응을 한다. 호응이 있어야 활력이 돈다. 그게 음식이다.


그냥 뱃속을 채우는 게 아니라, 기분을 좋게 만드는, 정신적인 향락이 음식이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누구랑 어떻게 먹을까를 결정하는, 끼니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정신적 작용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내가 더 많이 생각이 났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존재로서의 아내가 아니라, 정신적 작용을 함께 도와주는 협력자로서의 아내 말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에 처형이 장을 봐다 준 것들이 냉장고에 주방에 널려 있지만, 그런 정신적 작용이 활발하지 않으면 대부분 레토르 즉석 음식으로 흐른다.

오늘 아내의 존재 이유를 더욱 알게 되었다.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옆에 없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정신적 작용이 피곤해진다. 대충 먹게 된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질 않는다. 멀리 있는 아내와 통화를 하다 보니 냉장고 가까이에 있는 나보다 아내가 훨씬 더 자세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조합을 제시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 정확하게는 내가 음식은 만들었지만, 조합을 만들어낸 건 아내다 - 어제저녁 메뉴가 볶음 고추장 김치 비빔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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