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고 싶진 않지만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더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나에게 뭐라고 말하려나. 영화는 정말 사랑 할 수 밖에 없어 그러니 꼭 영화관에서 보는 것 그 이상은 절대 하지 마.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에 가장 끔찍한 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려다 실패 하는거야 라고 말하려나. 물론 나는 실패 조차도 못 한 ‘아무것도 안하는’이다. 그리고 내 이름은 박지영이다.
오늘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나 목마름, 쉬 마려움 대신에 숙취가 날 깨웠다. 발가벗은 내 몸과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처럼 침대까지 흘린 옷들은 내가 지난밤 마신 술 병 개수를 떠오르게 했다. 지난밤 상암에서 드라마를 함께 촬영했던 피디들을 만났다. 여전히 바쁜 그들 사이에서 백수인 나는 화단에 잘못 심긴 풀 같았다. 도시 조경을 위해 모양 별로 깔별로 줄 맞춰 심은 나팔 꽃 사이에 잘못 심긴 이름 모를 풀. 솔지랑 영어 수업 때 쓸 영어이름이 하나 필요했는데 full로 하면 되겠다. 마이 네임 이즈 풀. 괜찮은 거 같다.
아무튼 어제 풀은 본인이 풀인 걸 들키기 싫었나보다. 그럴싸한 드라마 감상 후기를 떠들어 대며 그들 주머니에 있을 법카를 믿고 술병들을 쌓아갔다. 소주 마시냐는 피디의 도발에 나는 결국 취해 화장실에서 토하다 몰래 택시타고 집에 왔다. 그나마 술버릇이 귀가본능이라 다행이다. 내가 풀임을 틀키고 싶지 않았지만 가볍게 맥주 마시는 자리에서 취해 택시까지 타고 집에 갔으면 너 나팔꽃이고 나 풀이다 라고 이 연사 크게 외친 것과 진배없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본드대신 손으로 붙잡으며 씻었다. 씻으면 알콜도 씻길 줄 알았는데 알콜은 수용성이 아닌가보다. 한의원에 가려고 집을 나섯다. 버스를 타자 어제 택시를 타고 온 것이 생각났다. 성산대교 였을까? 가슴 깊은 곳 아니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토를 주체하지 못해 택시를 잠시 세우고 신명나게 토를 했던 기억.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하는 건가 보다 버스가 흔들거리자 어제의 구역질이 아직 남아있는지 시동을 걸었다. 입을 틀어막으며 한의원 근처에 내리긴 했지만 도저히 침 맞을 기운이 없어서 잎새네 집으로 갔다.
날 한심한 눈으로 반겨주는 잎새. 어제 봤던 구경의 눈보다 더 따듯해서 좋다. 바닥에 누워 한참을 떠들다가 웃다가 쟁반 짜장과 짬뽕을 시켜먹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워 한참을 떠들다가 웃다가 자고 일어났다. 그제서야 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봄 잠바가 더워진 5월말의 날씨였다. 버스를 타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입을 틀어막을 뻔 했지만 다행히 집까지 잘 도착했다.
술을 온몸으로 마신 것도 아닌데 옷에서 어쩜 그렇게 술냄새가 나는지.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했다. 가방에서 잎새가 준 마카롱을 꺼내 먹었다. 이불을 예쁘게 정리했다. 침대에 누워 노래를 들었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사람들의 사진과 영상을 구경했다. 나도 킹스오브 컨비니언스의 노래가 나오는 오디오를 동영상으로 찍어 올렸다. 빨래 건조대를 꺼냈다. 빨래를 널었다. 냉장고에서 잎새가 준 마카롱을 하나 더 꺼내 먹었다. 오늘은 꼭 시나리오를 써야지 라는 생각으로 노트북을 켰다. 한글 프로그램 정품인증을 했다. 창문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으로 유투브영상을 봤다. 오마이걸 영상을 보고 다비이모의 노래를 들었다. 해피투게더 원더걸스 편을 봤다. 밧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졌다. 노트북이 있는 부엌 옆으로 갔다. 의자에 앉았다. 한글프로그램을 켰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