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여느 때와는 다르게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편안하게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정말 밝은 빛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고 너무나 눈이 부신 나머지 나는 번뜩 일어났다. 이상했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고 평온했다. 일분일초가 맵게 느껴지던 그 무거운 공기가 걷혀있었다. 만삭의 몸임에도 내 몸마저 가볍게 느껴졌다. 아픈 가슴과 늘 고여있던 눈물이 잠시 덮인듯하였다.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 않았고 눈물은 여전히 고여있긴 했지만 흘러내리진 않았다. 아무래도 나비가 나는 것처럼 나의 날갯짓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새로운 삶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느꼈고, 삶에 대한 애착과 미련마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없기에 고요했고 당장 지금 먹을 것만 있으면 그것만으로 만족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생겼다.
날기 위해서 다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했었나 보다. 나는 사랑도, 사람도, 신뢰도, 기대도, 실망도, 억울하고 화나는 감정도 다 버렸다. 쓰레기통에 다 집어던져버렸다. 그러고 나니 후련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 숨결이 살아있어야만이 내 세상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 마음에 병듦이 낫는 것이 중요하고,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내 삶이 건강하게 영위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꽤나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내 뱃속에 태아 역시 내가 건강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지막이라고 굳게 다짐했기에 내 안에서 새 힘이 샘솟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힘은 조용했다. 조용하나 묵직한 돌덩이와 같이 사라지지 않았다. 온 힘을 한 곳에 모아 앞을 향해 전진하기에 자칫 주변을 돌아볼 틈도 없이 멈추지 않고 갈 길을 가게 했다. 이것이 선한 힘이라면, 나를 제외한 누구도 다치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 내가 힘든 것은 나를 단련하는 좋은 채찍이라 믿으며, 더 건강하고 더 단단한 내가 되기 위해 견뎌내야 할 인내의 시간 속으로 발을 디뎠다. 그렇게 나는 나를 내려놓으며 강한 빛에 이끌렸다.
내가 날기 위해서 가장 내려놓기 힘들었던 것은 내가 사랑한 시간들이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을 사랑한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 안에는 헌신과 배려, 서로를 향했던 아낌과 눈물, 함께 하고자 지켜왔던 신뢰와 인내, 부족함이 서로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다 채워지던 나에겐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그 시간들이 있었다. 영원했으면 더 좋았을 관계들이 더 이상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가까운 이들이 내가 아프고 힘들 때 곁에 있어줄 거란 믿음은 슬픈 착각이었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으려 또 다른 이에게 뻗은 손마저 거절당했을 땐, 평범하게 지내던 모든 날들이 다 사라질 만큼 이웃과 함께하는 세상의 의미가 단숨에 사라지고 내게 유일하게 손을 뻗어준 고독함만 붙잡게 되어 조용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누가 알았을까, 내가 이렇게 될 줄 나도 몰랐으니. 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좋았고 그들의 소중함에 대해 나는 잊지 않고 내 것을 나누며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고 내 곁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렇게 빨리도 혼자 고립된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실망감은 내게 당혹스러움과 충격으로 다가온듯 하다. 나의 이성이 흐려지고 가슴에서 뿜어내는 눈물만이 조용한 외침을 하고 있을 뿐, 뱃속 태아를 위해 험한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나의 성격은 나를 더욱 도망치게 하였기에 나는 이전의 사랑으로 가득했던 그래서 행복했던 모든 지난날의 추억과 기억으로 겹겹이 덧칠해진 아름다운 시간들을 내려놓는 것이 정말이지 힘들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희망 가득한 미래마저 싸 글이 내려놓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 나를 잃었기에 새로운 백지를 주었어도 나는 어느 것도 그리지 못하였고 차라리 까만색으로 모두 다 덮어버리려던 마음으로 그 밤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가여웠는지 누군가 내게 꿈에서나마 희망의 빛을 비춰줬고, 나는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왕이면 높이 날아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내가 행복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