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출산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가로 내려왔다. 남편이 너무나 바빠서 나와 신생아 아기를 돌봐줄 수 없었기에 그리고 나는 기력을 전혀 회복하지 못하였기에 부모가 되자마자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 10년 만이었다.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금의환향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상상해 왔지만 이렇게 아기를 안고 도움을 받기 위해 돌아오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고 왠지 모르게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 온 후, 부모님은 내가 혹시나 잘못될까 시시때때로 나의 건강상태를 체크하셨다. 그리고 나는 힘들게 태어난 우리 아기를 정성껏 보살피며 힘겨운 육아전쟁은 시작되었다.
나의 방은 그대로였다. 우리 엄마는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기에, 나에게 소중하다 생각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셨다. 언제든 너의 방에 와서 쉬고 가라며 정돈해 놓으신 '내 방'에 아기와 함께 머물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중고등학교 때 품에 껴두고 살던 수학책, 매년 쓰던 다이어리, 한 권 한 권 모았던 전공책들.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찬란하게 그려왔던 흔적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작 그리도 삶에 열정을 품었던 '나'만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없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의 가족들은 내 모습에 적잔이 충격을 받고 오로지 사랑으로 나를 감싸 안아줬다. 우리 가족은 이전에 봐 온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하였을 때 심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내 딸이, 내 동생이 절대 우울증에는 걸릴 수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아기와 함께 집으로 들어온 나를 '사랑으로 안으리라, 덮으리라'는 마음으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였다. 아기에게는 무한한 사랑의 물결이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기가 50일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평생 책만 읽던 딸이, 오래도록 유학준비하던 딸이 책은 한자도 읽지 않고 아기만 보며 울다 웃다 하는 모습에 부모님께서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물론 아기를 돌봐야 하니 정신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다 포기해 버린 것 같은 내 모습 속에서 부모님께서는 상실감을 보셨던 것 같다. 아빠는 영어과외가 필요하면 붙여주겠다고 말씀하셔서 내 마음을 떠보셨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아침 일찍 산책할 겸 집 앞 공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가서 카페에 1시간은 있다 들어와라. 가서 앉아만 있든지 책을 읽든지 사람구경을 하든지 무조건 나갔다 와라.' 엄마는 진지하게 나에게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엄마의 눈빛에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까지 나는 정말 창가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차와 사람만 구경하다 들어왔다. 생각이 그렇게 많던 나였는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며칠이 흘렀을까, 그날도 멍을 때리다 한 가지 슬픈 생각이, 아니 슬픈 마음이 느껴졌다. 마음에 아무런 열심도 무언가를 향한 열정도 불타듯 다 사라져 버리곤 잿덩이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좋아해서 공부하게 된 내 전공을 나는 한 번도 실증난 적이 없었고 늘 재밌기만 했는데, 믿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지난날의 '나'에 대한 허무함이 느껴지면서 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고, 혼란스러웠다. 나의 즐거움이 사라졌고,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직면하고 나니 더 괴로워지는 듯하였다. 막막함이 더해져 갔다. 나는 이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야 하나, 아기에 대한 책임감과 함께 '엄마'로는 살아갈 수 있지만, 더 이상 '나'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세네 살 때부터 나는 책상에 앉아있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책상에만 앉으면 너무나 행복했다. 엄마는 내가 카페에 가서 책상에라도 좀 앉아있다오면 내 모습을 회복할 거라고 믿으셨던 것 같다. 아침에 출근하듯 나갔다 돌아오면 늘 내 표정을 살피시는 엄마 때문에 막막해진 그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막막함이 끝이 아니라고 믿음을 가져보았다. 우울함이 끝이 아니라고 나를 신뢰해 보았다. 어김없이 나를 떠밀어 밖으로 내보내는 엄마의 사랑에 나는 그날도 나가 카페에 앉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 진짜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을까? 이 세상에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 사라져 버렸을까? 한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저 깊은 곳에서 오래된 서랍 속에서 먼지 묻은 무언가를 발견하듯 나는 찾아내었다.
'글쓰기.'
늘 다이어리에 글을 썼을 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그냥 늘 그렇듯 늘 끄적이던 글.
'글쓰기, ' '네가 정말 나를 다시 찾아줄까? 정말 나를 다시 웃게 해 줄까?' 글쓰기가 진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무작정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다음 날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기가 자는 그 새벽 나는 1시간에서 2시간씩 그저 그날그날 떠오르는 감성과 생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벌써 1년 하고도 5개월 지나고 있다. 내가 무슨 글들을 썼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 가지 아는 건, 내가 웃고 있다는 것, 나를 찾았고, 이렇게 이곳에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나의 모습도 나일수 있겠지만, 지나온 나의 모습은 살아있는 나의 역사이기에 과거의 나일지라도 나의 숨결이 뿜어낸 열매들 속에서 때론 백 가지 좋은 것들보다 한 가지 가장 나다운 귀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그 보물을 발견하였고,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아기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나지막이 아기에게 말해본다. '아가야, 한 줄기 빛이 우리 곁에서 환히 비추기 시작한 것 같아. 엄마, 힘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