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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엘 Dec 13. 2023

똥손도 아니면서 자꾸 깨뜨려!

낙인찍기STOP

인덕션 상판을 깨 먹었다.

찬장의 빈 유리병들을 정리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무게가 꽤 되더라.

손이 둘 뿐인데 욕심부렸지. 한 번에 여러 병들을 짚고 옮기고 하다가.

게다가 주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로


묵직한 유리병이 싱크대에 1차 충격을 가하고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제일 먼저 내 발상태를 체크했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반응. 발골절로 일 년을 고생했으니까


그다음엔 유리병이 깨졌는지 확인!

인덕션을 살펴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후다닥 정리를 끝내고

내 발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상황종료 해버렸다.


다음 날 아침에 주방에서 아내가 인덕션을 보고 놀라 조심하는 표정을 보았다.


충격!


내가 설마 인덕션을 깰 줄이야.

나는 똥손이 아닌데..


매사에 '조심'을 부르짖고 다니던 내가 아니던가.

아내와 딸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조심하라 말하며 비똥손으로서의 존재감을 뽐내던 내가.

똥손도 아니면서.

이런 사고를..


다행히 깨진 인덕션 상판의 부위가 치명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깨진 상판은 계속 갈라지게 될 거고, 해당 부위는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아내를 안심시키면서도, 정작 나는 진정이 안된다.

이런 사고를 쳤다는 것도 수용이 안되고.

아무튼 비똥손으로서 정체성이 헷갈리고..


상황을 파악하고 30분 뒤에 바로 A/S 신청을 하고

담당자와 통화를 하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려 진정이 안 되는 거다.


'아.. 이거 상황 덮으려고 지금 나 엄청 서두르는구나'


얼른 해결을 하고

비똥손으로 돌아가야 안정이 될 것 같아.


평소에 아내를 똥손이라고 수시로 놀리곤 했는데..

숙연해진다.


이 사태를 보고도 오히려 잠잠한 아내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며

나의 교만을 자책한다.


일주일 지나 상판은 교체되었다.

인덕션은 다시 새것이 되었다. 다만 수리비 34만 2천 원을 고스란히 지출!


인덕션을 수리한 날!

둘째 딸이 아웃백을 먹으러 가자고 하더라. 내가 아웃백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날은 입맛도 없고 어딜 가고 싶은 마음도 안 생기더라.

죄책감이 온 마음을 덮어 귀한 음식들 목구멍에 넘기면서도 흥이 나질 않았다.




큰 딸은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나를 제외한 우리 집안 유일한 비똥손이다.


뭘 부시거나 깨먹는 아이가 아닌데

지각을 피하고자 아침에 학교를 향해 달리기를 하다가 핸드폰 액정을 깨 먹었다고 한다.


'아.. 얘는 또 왜 그러지. 비똥손계 인데..'


무슨 종족이라도 나누었나. 똥손계, 비똥손계..

가족 내 비율도 왠지 적정 수준으로 나뉘는 것이 재밌네.


그래서 그런지, 큰 딸이 핸폰 액정을 깬 사실이 남일 같지가 않다.


비똥손들이 뭘 자꾸 이렇게 깨고 다닌단 말인가. 희한하다. 이럴 수는 없는데..






큰 아이의 핸드폰을 들고 수리를 맡기러 가는 길.

또 이 사태를 서둘러 수습하려는 내 마음을 마주한다.


'올해는 이상하네 정말.. 발이 골절되지는 않나. 멀쩡하던 인덕션을..'


핸드폰을 수리하기 위해 센터에 방문하자

대기가 길다.


핸드폰 수리, 그것도 액정수리 고객의 대기가 길다. 


'액정 깨는 사람들이 꽤 되나 보군'


불현듯, 하루에 액정을 깨먹는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 인구 안에서 비똥손계열은 몇 명일까?






7만 5천 원 - 액정교체 비용.

큰 아이 핸드폰 처음 샀을 때와 비슷한 비용.


인덕션 수리비랑 합치면..

;

계산은 거부한다.


다시는 없을 일이라, 다시는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지지 않을 거라 다독이며

자꾸 위축되는 마음을 달래 보지만,


이미 비똥손으로서의 자존심은

깨. 졌. 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내가 어떤 정체성이 있다고

누구랑은 다르다고, 절대로 나는 다르다고

분류하고 판단 내리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일인가.


노래방에 가면

쟤는 노래 못하는 넘, 쟤는 노래는 안 하고 술만 마시는 넘, 쟤는 트로트만 부르는 넘, 쟤는 춤만 추는 넘.

- 하고 얼마나 인간을 재단해 왔던가.


지금부터

아내와 둘째를 똥손계열로 묶고

나는 다르다며 완전히 다른 종족이었던 것처럼

자존심을 세워왔던 오만함을 버린다.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설렁설렁 살면 찡그릴 일도 줄어든다.

안 다쳤고, 수리해서 해결이 될 일들이었으니

된 것이다.


이상한 것에 의미 부여하지 말고

즐거운 연말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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