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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엘 Dec 12. 2023

옷을 잘 갖추어야 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높은 가치

2년 정도 되었을까.

아내는 정기적으로 유방전문 외과에서 검사를 받고 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슴에 선종 몇 개가 발견되었고, 형태나 사이즈의 추이를 관찰하기 위한 목적이다.


아내가 병원을 다녀오는 날은 특별히 기도시간도 늘리고

다녀온 후기를 꼼꼼히 물어보곤 한다.


항상 아내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실제로 선종이 문제가 되지 않기에 그런 것 이기도 하고, 아내의 스타일이 그런 편이다.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언제나 나는 아내의 무겁지 않은 정서가 참 좋다.

그러나 나도 아내도 나이 들어가고 있다.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더 좋은 모습과 정서를 선물하고 싶다.  









회사 일을 접고 가장 큰 변화는 시간과 장소의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퇴사후 해야 할 일 리스트에도 올려놓았었다. 아내의 병원 일정에 반드시 동행한다는!


아내는 한사코 혼자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아내의 정기검진에 동행한다


사실 이런 행위는 내게 의무에 가깝다.

혼자 가도 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해 주는 아내 덕분에 지난 몇 년간 유예받은 것일 뿐.

 

가진 옷들 중에 가장 보기 좋고 아끼는 옷을 꺼내 입었다. 머리도 잘 다듬고, 강의 때만 꺼내는 구두를 신었다.

 

아내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병원이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병원 관계자분들을 대면할 것이고,

주치의를 만나 검사결과도 듣게 된다.


허름하게 대충 입고 가서 아내가 쌓아온 인상을 망치고 싶지 않다.

검사결과야 어떻든,

나는 아내의 기분과 정서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다. 시간이 많아도 하지 않는 일들이 있듯이

일부러 시간을 쪼개가며 무언가를 하기도 한다.


인간은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기 마련이다.


잠깐 엑스레이 찍고 주치의 만나서 환부의 추이만 보는 일정이다.

아내의 생각은 굳이 이렇게 심플한 일정에 남편까지 대동할 필요 있을까 싶은가 보다.

효율이 떨어진다나,,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 삶에서 중요했던 순간들은 모두 가치가 있는 시간들이었다.

효율을 따지거나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반드시 기쁜 일은 아니더라도 중요했던 순간들 말이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들로서..

꼭 그 시간, 그 공간에 존재했어야 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많이 놓쳐왔다.

코칭 때문에, 강의 때문에, 사소한 회사일 등등..




현재까지 내 생애 최고의 교육이었다 여기는 2018년 이천 연수원에서..

교육대상자였던 리더들의 엄청난 몰입과 변화를 일으켰던, 그 센세이셔널의 현장이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서.


아내로부터 아버지의 실종소식을 들었다.

심한 치매증상이었던 아버지가 발견된 곳은 실종지로부터 40킬로 떨어진 시골 파출소.

아내는 내가 연수원에서 교육에 집중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어 이제야 소식을 전한다 하였다.


내가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상황이 모두 종료된 시점.


어머니와 아내, 둘째 딸이 찾아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고 들었다.

"할아버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어!"라고 아버지를 안으며 둘째가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모두 전해 들은 것이다. 직접 보지 못했다.


아버지를 발견했던 그 시골 파출소에는 내가 갔어야 했다.

아버지를 발견하여 잘 안내해 준 분께 고개 숙여하는 감사인사는 내가 했어야 했다.

추위에 떨며 40킬로를 걸었던 아버지의 몰골을 보고, 안타까워 미치겠지만 감사한 마음은 내 것이어야 했다.


나는 당시 시골 파출소에 존재하지 못했다.

좋든 싫든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높은 가치의 순간은 바로 그런 거다.


나는 이미 여러 번 잃었다. 이 귀한 순간들을..







높은 가치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더 이상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는 시간에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시간에 아무리 좋은 기회가 열린다 할지라도

기회보다 가치가 우선이다.

더 이상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도착한

병원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소파에 앉아서 대기했던 것, 그리고 주치의를 만나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인 정도이다.

모든 과정이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병원에서 밖으로 나와

아내와 점심식사를 했다.

싼메뉴인데 비싼 음식점에 아내를 데리고 들어갔다.

흔한 밥집인데, 고풍스럽고 분위기가 좋다.


다만

음식냄새가 옷에 진하게 베어 갔다.


"이게 뭐야. 옷에 냄새 다 베네"


"뭐긴.. 이게 사는 거지. 이게 잘 사는 거야. 이렇게 살면 되는 거야. 앞으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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