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지 9개월이 넘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상세히 기록하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시간은 무섭게 흘러갔습니다.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생활의 적응은 쉽지 않았고, 9개월간은 하루하루가 좌절의 연속이었고 그에 따라 자존감이 많이 무너졌습니다. 한국에서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확실했고, 그 일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팀장님 실장님께서 계속 피드백을 주셨지만, 여기서는 잘하고 못하고도 모르지만 제 일에 대해서 다들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제 일이 의미 있는 결과물인지에 대한 불안함이 계속 생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불안과 불확실은 미국이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11년간 하던 일과 다른 일을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순간을 즐기면 되는 일인데, 저는 이 불확실이 너무나 불안했고, 제가 기대한 만큼의 성과도 없이 하루하루 지쳐 가기만 하였습니다. 가끔 힘들 때면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확실하게 돌아갈 곳이 있었기에 미래가 걱정되는 상황이 아니므로 하루하루 미국 생활을 즐기고, 아이들과 즐겁게 보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까? 얼마나 꿈꾸었던 미국인 가요? 그러나 성격상 그것이 잘 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어떻게 온 기회인데 그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이 드니 더더욱 즐겁게 일하기 쉽지 않았고, 새로운 업무에 지치다 보니 제 생활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고, 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왜 이렇게 힘들어할까?
첫 번째는 전면 재택근무로 적응이 더디고, 사람들과의 교류가 매우 부족합니다.
COVID를 시작으로 재택근무를 시작한 미국 회사들은 거의 재택근무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리더를 3번 정도밖에 못 만났을 정도로 대부분의 직원들은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을 즐깁니다. 처음에는 꿈의 직장생활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애들도 적응시켜야 하고,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것들도 많았기에 재택근무는 정말 축복 같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워킹맘에게는 최적의 근무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유효기간은 딱 2개월 까지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업무에 익숙하고, 사람들과도 잘 아는 사이이고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에 빠삭하였다면 아직도 재택에 대해서 극찬을 했을 수도 있지만, 미국 생활이 처음이고 업무도 처음이고 회사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재택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니 막막했습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지속적으로 물어보지 않은한 알기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뭔가 하고는 있는데 이것이 잘하고 있는 일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일주일 최소 3번 이상은 회사에 나가려고 노력을 했지만, 회사에 나가도 아무도 없었기에 내가 지금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헷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넓은 사무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외로움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과 만나지 않고 업무 관련 회의만 진행을 하니, 전체 흐름을 읽는 것도 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이 빠르고 말도 얼마나 많던지 회의 때 조금만 집중을 잃어도 순식간에 내용 따라가는 것도 어렵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중간에 끼어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의시간은 칼같이 지키기에 회의 시간 내 내 의견을 말하기 위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회의에서만 보이는 나의 모습이 나의 전부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기에 최대한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하였고, 나와 크게 상관이 없는 회의에도 참석해서 한마디라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9개월이 지난 지금 아주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지만 눈치로 세상을 봐오던 저에게 재택근무는 아직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두 번째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많은 미국 회사에서 일해 본 것은 아니기에 이것은 선입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친구들은 본인의 업무 영역이 확실하며, 그 외에는 관심이 적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업무 영역에서 조금만 벗어난 질문을 하면 본인의 일이 아니라고 모른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편하기도 한데, 제 역할이 프로젝트를 이끄는 역할이다 보니, 현상이 어떤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다들 그건 나도 몰라라고 얘기를 하니 무척 답답했습니다. 여러 사람과 회의를 해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고, 리더는 기다리면 된다는 얘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다 재택으로 인해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 보니, 업무 파트너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하는 일에 내가 빠져 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현상 파악하는 것에만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데드라인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하고, 그 이상은 기간을 더 요구했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업무를 이번 주까지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B라는 업무가 생기면 저에게 A/B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묻고 B가 더 중요하다고 하면 A는 다음 주까지 하겠다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물론 업무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 일을 하지만, 본인이 정한 업무 이상의 업무는 하지 않고 워라밸을 확실히 확보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프로젝트에 목표를 두고 있는 저와 달리 그들의 목표는 이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인력난에 시달리는 미국 회사에서 능력 있는 직원들은 그만두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는 그만두기 직전 거의 매일 같이 헤드헌터에게 연락을 받았었다고 얘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온 후 저희 팀의 1/3 이 바뀌었을 정도로 회사를 관두는 것은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회사에서 비전을 찾지 못하거나, 회사의 일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가차 없이 그만두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대의 능력치를 발휘하여 아웃풋을 내기 때문에 결과물 자체는 높은 질을 냈지만, 프로젝트의 관점에서의 책임감은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내 주변에 몇 명의 동료나 남아 있을까'라는 소소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세 번째는 나의 마음 가짐의 차이
새로운 일에 대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접근을 해야 하는데 기존 마음과 기존 방식으로 접근하니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의 경우 주재원으로 온 것이므로 기존 방식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현지의 아웃풋과 한국의 기대치의 간극이 큰 상황에서 제가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컸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현지 직원들과의 관계에서 아웃사이더와 같은 기분을 계속 느꼈습니다. 같이 일하고 있지만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매우 외로웠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저에게 아웃풋을 요구하다 보니, 아웃사이더로서 나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의 위치를 조금씩 찾아갈 수 있었고, 양쪽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미국 동료들의 소속감 문제는 단지 내가 한국에서 왔기 때문이 아닌, 전체적인 미국의 분위기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불안했던 저의 9개월,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연락하며 나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고, 조금씩 바쁜 하루하루 살기 시작했고, 내 일에 대해서도 조금씩 정체성이 드러났고 나의 존재도 조금씩 각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연말에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게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연말 인사평가에서 리더가 아주 좋은 평가를 주어서 몇 개월 동안의 저의 걱정과 우려가 눈이 녹듯이 녹아내렸습니다. 특히 리더는 상세하게 평가를 작성해 주었기에 항목별로 나의 9개월을 돌아볼 수 있었고 그래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이대로만 하면 되겠구나 하고 평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되었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최선을 다하니 나의 노력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남은 기간은 즐겁고 효율적인 미국 생활이 되도록 좀 더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