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람의 허물은 아랫사람의 과제다.
“인나(일어나) 보이소. 용이가 아파예. 위떠끌(윗터골) 할매 좀 불러 오이소. 빨리예.”
한밤중, 전등 불빛 아래. 안방에 누운 오빠는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넋이 나간 채, 아픈 아이의 몸을 어루만지며 들리지도 않을 말을 쉼 없이 건네고 있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재바른 걸음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바늘과 소금을 찾으시더니 오빠의 열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따고,
그 자리에 소금을 문지르며 나직이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자연에 오빠의 회복을 간절히 비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오빠는 자주 아팠고, 지금까지도 그 아픔의 반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그런 오빠가 늘 못마땅했습니다.
국민학교 시절, 지적장애가 있던 학교선배에게 단지 '오빠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주 맞았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으나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무지한 환경에서는 약자가 폭력의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약한 사람을 본능처럼 감지합니다.
어리숙하고 내성적인 성향은 그곳의 생존 환경에선 곧 약점이었고,
남매였던 우리 둘은 늘 조롱과 폭력의 먹잇감이 되곤 했습니다.
무력한 환경 속에서 나는 어른들의 외면에 점점 실망했고, 분노는 쌓여만 갔습니다.
‘왜 우리 가족은 이렇게 무능하고 약하기만 할까. 재 주변은 왜 이리 폭력적일까.
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을까?'
가정과 학교는 전장 같았습니다.
지긋지긋한 피로에서 벗어나고자 결혼을 택했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흘러주지 않았습니다.
내 안이 정리되지 않은 채 시작한 삶에서, 변화는 없었습니다.
약한 기운은 그대로였고, 나는 다시 불행을 껴안은 채,
또다시 가족을 탓하며 살았습니다.
도피는 답이 될 수 없었고, 현실은 반복되었습니다.
‘왜 내게는 어른이 없었을까’
사무친 아쉬움은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조금씩 이해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신뢰받는 어른이 되지 못한 내 모습에서, 나는 과거의 부모를 보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또래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을 때, 나는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겁에 질린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 나은 환경, 더 많은 배움 속에서도 내가 이 정도라면, 부모 세대는 얼마나 더 큰 벽이 있었을지.
나는 그들의 무력함을 탓할 수 없었습니다.
삶의 고비에서 진리를 찾아 배운 것이 있습니다.
“윗사람의 실패는 아랫사람에게 주어진 공부 자료다”
나는 바라기만 했고, 불평만 많았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그들이 하지 못한 일은, 내가 해내야 할 몫이라는 걸요.
한때 부모님과 오빠는 한 많은 집안에 갇힌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으니까요.
답답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습니다.
그들이 멈춘 듯한 모습 덕분에
나는 인생의 틀을 깨고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족함은 내가 채워야 할 몫이었고,
허물이 보였다는 건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였지요.
그들이 멈춘 자리를 대신해, 나는 더 많이 배우고 채워야 했습니다.
다행히 그럴 수 있는 힘과 환경이 내게 주어졌습니다.
배워 나누는 일, 그 단순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의 고통이 필요했습니다.
최근 한 만남에서, 누군가는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윗사람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문제 해결보단 남 탓만 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나 또한 한때 그랬으니까요.
문제를 분별할 수 있다면, 해결할 책임도 스스로에게 있다는 걸 늦게서야 배웠습니다.
연이은 실패 끝에 마주한 현실은, 자연이 내민 시험지였고 나는 수없이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의 학교폭력을 방관했고, 창업도 결혼도, 인간관계도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분별이 모자람을 알고 나서야 삶을 멈추고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엉망이던 인생을 다시 바라보며 미움은 이해로, 불만은 실천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이해와 존중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요.
이제는 가족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걱정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저 내 몫의 일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가족의 허물은 내가 넘어야 할 관문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나는 의논과 선택의 힘을 배웠고, 원망은 줄고 마음은 조금씩 여물어 갔습니다.
작년 가을, 어머니가 낙상 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수업의 마무리 발표를 앞두고 있었고,
곧장 달려가야 할지, 맡은 책임을 끝까지 완수하고 움직여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의논 끝에, 나는 주어진 일을 마치기로 했고 오빠는 곁에서 어머니를 지켰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허물로만 보였던 가족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자라 가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간섭이 사라지자 오히려 스스로 자라는 힘이 보였습니다.
불행을 탓하기보다 함께 배우고 채워 가며 변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사고와 불행, 허물 같은 시간들은 결국 내게 가장 값진 공부였습니다.
윗사람의 실패는 나를 위한 수업이었고,
고난의 패턴은 새로운 길을 찾도록 안내하는 이정표였습니다.
윗사람의 허물은 묻습니다.
“너도 그리 살 텐가?”
허물은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딛고 일어설 디딤돌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허물을 내어주며 새로운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도 나는 그 허물 위에 서서 서툴게 배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비칠 나의 허물이,
내일은 조금 더 옅어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