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의 풋살

축구왕 왕발이를 꿈 꾸며

by 램프아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의 왕발이와 내가 없는 시간의 왕발이는 뭐가 다를까.

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알리가 없다. 그냥 왕발이가 말해주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것이 내 남편의 사생활이랄까.


요즘 내 남편의 사생활이 한 가지 더 늘었다. 회사 사람들과 주 1회 풋살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한 뒤 고딩시절 친구보다 회사 사람들이 더 친구 같은 나였다.

회사 사람들과 주말을 보내거나 가족끼리 만나는 일도 흔했던 나와는 달리, 회사 사람들이랑 열심히 거리두기를 하던 왕발이였는데.

회사 때문에 상경해 살게 된 우리에게 회사에서 어울릴 수 있는 동료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왕발이가 회사 사람들과 영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던 차였다. 주말에도 나가서 놀고 오라고 등 떠밀었지만 별 관심 없던 왕발이. 동료들과 풋살을 한다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풋살 첫날, 마라톤 완주를 실패한 몰골로 집에 온 왕발이는 첫 경기 10분을 뛰고 온몸의 마비증세를 느꼈다고 했다. 늘어난 파리 생제르망 츄리닝 바지 위로 올라온 시장표 아디다스 양말이 애처롭게 겨우 매달려 있었고, 목 늘어난 티셔츠는 벌건 목 주변으로 상추처럼 너덜했다.-그 파리 생제르망 츄리닝은 진짜 파리에서 산 것이었다. 파리 생제르망은 개뿔 둘다 좋아하지도 않지만 뭐라도 사야할 것 같아 허겁지겁 사왔던 것이었다. - 왕발이는 그 10분 간 오랜만에 전력질주를 한 탓에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마비가 왔다고 했다. 하지만 고작 10분 뛰고 마비가 왔다는 게 꽤나 쪽팔렸던 왕발이는 혼자 등을 지고 앉아서 119를 부를까 말까 심각한 고민을 했다고 했다. 남편이 풋살 10 분하다가 응급실 실려가 큰일을 치를 뻔 한 나는 그런 걸 쪽팔려해서 쓰냐고 했지만 남자들의 자존심 세계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건 첫날 너덜너덜했던 왕발이는 자신의 사지육신을 탓하며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풋살 세 번째 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왕발이는 드디어 골을 넣었다고 했다. 손흥민 전매특허인 찰칵 세리머니를 했다고 했다. 파리 생제르망 츄리닝을 입고 새로 산 풋살화를 신고 있었다. 사실 주말에 풋살화 사러 갔다가 더운 날씨와 산 댔다가 안산댔다가 쓸데없이 신중한 왕발이 때문에 좀 짜증이 났었는데. 결국 쿠팡으로 최저가 풋살화를 시킨 왕발이는 골을 넣고야 말았다. 풋살화 전문 매장에 가서 좋은 풋살화를 사준다고 해도 극구 거부하던 왕발이가 조금 짜증 났었는데, 또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했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니 웃겨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음 날 출근길 아무리 생각해도 웃겨서 물어봤다.


"아, 우리흥 세리머니는 정말 좀 오버지 않아? 안 창피해? 아니 10분 뛰고 119 부르는 건 창피했다며"

"야, 그날 골 넣은 회사 동료 중에 한 명은 -울트라파워슛팅!!(뭐 이런 비슷한 계열)- 외치면서 골 넣었어"

"미친 거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른네다섯 살, 그 이상 먹은 남자들이 모여서 초딩들처럼 울트라파워슛팅!!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내 눈에 아른거렸다. 땀 흘리며 공 차며 느끼는 순수한 기쁨과 그 기쁨을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연대감이 부러웠다. 약 십 년간 사회생활을 했지만 그렇게 서로 순수한 기쁨과 연대감을 느낀 사람이 내겐 있었나?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부러웠다. 왕발이가 회사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걱정했던 내가 바보 같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왕발이가 풋살 하러 간 날에 혼자 집에 와서 샤워를 하거나 화장품을 바를 때 '아 지금쯤 에네르기파..라도 외치고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피식 웃곤 한다. 오늘도 로션을 바르다가 헐레벌떡 컴퓨터 앞에 앉았다. ' 아 이건 써야 해!' 하면서.


그 뒤에도 종종 왕발이가 골을 넣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루머의 루머일 수도 있다. 왕발이 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남편의 풋살을 응원한다. 주1회 풋살과 함께 줄어드는 뱃살은 더더욱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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