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개는 우렁각시

우렁각시는 전생에 100% 내게 죽을죄를 진거야

by 램프아이

최근 약 2주간, 왕발이와 나는 주말부부 수준으로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왕발이는 회사에서 영업직군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연말 마감 보고서나 22년 계획 보고로 분주하여 자의0 타의100으로 일주일 내내 철야를 하고 있다. 내가 누워 잠이 들까 말까 할 때 즈음 집 지친 왕발이의 왕발자국 소리와, 현관 키패드 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오는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나 역시 여유로운 편은 아니다. 몸은 왕발이 보다 조금 더 여유로울 수도 있지만 마음이 그렇지 못했기도 했고 리드가 된다는 것이 현실이 되면서, 실제로도 저녁 약속이 생기거나, 술을 진탕 먹고 들어오거나, 늦어지는 일이 꽤 많았다. 늦게 들어오지 않더라도 집에 와서도 항상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일 많이 변한 것은 내 입맛이다. 내 인생 30년 조금 넘었지만 2021년은 어느 해보다 기록적인 해였다. "마시는 걸로 씹는 걸 대체하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라는 신조로 30여 년을 살아왔던 나였는데, 왕발이와 함께 살게 된 이후로는 180도 바뀌어서는 먹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주말에 뭘 먹을지, 어떤 걸 장을 볼지, 집에서 요리를 할지 나가서 먹을지... 내 주말 고민의 대부분은 거의 그런 수준의 것이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이 쪘고, 복부지방과 셀룰라이트만큼이나 피하 사이사이에 안락함이 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나를 "본연의 나"로 돌려주었다. 최고의 다이어트는 마음고생이라던가. 아니 근데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 같으면 스트레스받고 입맛이 없으면 몸에 기운이 없어서 그것 또한 악순환의 반복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좋아.' 목표했던 몸무게에 근접해가는 체중계의 디지털 숫자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기기묘묘한 성취감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었다.


"본연의 나" 시절을 알던 왕발이는 나의 정신적 메트로놈이 고장 날 것을 걱정하는 게 보였다. 왕발이는 누구보다 "본연의 나"로 돌아가는 걸 우리 엄마만큼이나 걱정해주는 사람이다. 걔는 며칠 간 묵묵히 야근을 했고, 나를 눈치껏 살폈다. 나 역시 왕발이의 왕발자국소리가 복도에서 울리지 않으면 잠이 들지 못하기도 한 것 같다.


외근이 잦은 왕발이의 업무 특성상, 오전 근무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집에 잠깐 들를 수 있다. 잔뜩 쌓인 빨래와 설거지를 처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내가 퇴근할 때 더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배려해 준 것은 물론, 집에 돌아오면 한 번씩 꼭 안아주는 코스도 만들었다. 약 2주간 둘이 주말에도 정말 소진되어 우리 답지 않게 집밥을 하나도 못 먹었는데 오늘은 왕발이 가 밀 키트 가게에 들러 황탯국과 불고기를, 그리고 현미가 들어있는 따뜻한 밥도 해줬다. 금요일만 버티면 된다는 기쁨도 한 스푼 먹었다. 밥을 먹다 보니 맛있었다. 3주 전 우리 엄마랑 함께 한 김장김치가 벌써 어느 정도 익어가고 있었다. 목이 아프다고 하면 안마도 해주고, 자기 전에 말하지 않아도 가습기도 틀어주고, 물도 따라주는 천사 같은 왕발이에게 더 고마웠다.


왕발이는 전생에 내게 죽을죄를 진 것일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가도 왠지 왕발이가 전생에 내게 죽을죄를 진 것이라면 나는 떳떳하지 않을까. 하며 호의를 기꺼이 뻔뻔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좀 더 멋지고 안정적인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도 기꺼이 왕발이의 힘듦을 보살펴줄 수 있는 왕발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여담.

2주간 우리 집 어항에서 오토싱이 죽고, 여러 마리의 새우가 죽었다. 램프아이 한 마리의 탄생을 보았지만 내 실수로 치어를 옮기다가 죽었다. 꿈에서 죽은 새우와 오토싱이 나왔다. 우리 집 어항 생명들에게도 좀 더 성숙한 내가 되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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