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친구랑 화장실 좀 같이가지 마
왕발이의 고향은 대구다. 나의 고향은 대전이다. 둘 다 지방 사람이다. 각박한 세상 속 서울살이는 힘이 든다.
여기엔 친구들도 없다. 우리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지 않기 때문에, 고향과의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왕발이는 내심 말은 안 하지만 친구들을 굉장히 그리워하는 것 같다. 딱 한번, 고된 퇴근을 한 어느 날 불현듯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외롭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별 말 아닌 것 같은데도, 왕발이가 외롭다고 말한 것이 너무나 의외라서 내 머릿속에 깊숙이 남아있다.
우리는 대학교 친구가 같다. 같을 수밖에 없다. 같은 학교 같은 학부였으니까. 걔 중에서도 자주 어울리는 몇몇 친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어깨'다. 얼마 전 지하철 기관사가 된 친구. 어깨가 직각이라 어깨라고 부르겠다. 대구에 살고 있다. 종점에 갈 때까지 마음대로 생리현상을 처리할 수 없는 고충을 가진 자로써 상시 소변 봉투를 소지하고 다니는 인물이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기념으로는 소변 봉투를 선물로 준 후안무치한 인물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하철 종점에는 각종 검은색 쓰레기봉투가 전철 선로 밑바닥에 난자하다고 하니 상상해볼수록 처참한 광경이다. 왠지 체험 삶의 현장 유니콘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어깨가 지하철 방송을 하는 걸 들어봤다. 진짜 그야말로 내가 지하철에서 듣던 기관사 목소리였다. 어쩐지 안내 방송을 하는 기관사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근데 그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비슷하게 젠틀한 목소리다. 목소리 톤은 젠틀하지만 기관사의 기분에 따라 "출입문 닫겠습니다."의 억양만 달라지는 것 같다. 문 닫는데 한 마리 미친 사슴처럼 뛰어드는 탑승객에게 준엄한 경고를 비치는 목소리.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상한 아빠처럼 타이르는 목소리. 때로는 난 관심 없고 문을 닫겠다는 차도남 같은 목소리까지. 암튼 기관사 목소리는 왠지 점잖게 느껴진다. 어깨는 원래 내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를 만큼 목소리는 이미 증명되었으니 기관사의 자격은 갖췄던 셈이다. (?)
암튼 어깨와 어깨의 여자 친구, 그리고 우리 부부는 종종 분기에 한 번씩 캠핑을 함께 다닌다. 어깨의 여자 친구는 라떼식으로 표현하면 "ㅇㅇ동 장금이", 캠핑 가서 오징어내장탕을 할 줄 아는 여자다. 그리고 우리 두 부부는 기꺼이, 장금이의 모든 요리를 가리지 않고 먹어주는 환상의 시식가랄까.
아니, 나도 친구랑 화장실 가는 거 초등학교 때 끊었는데!
어깨와 왕발이 그 둘을 보고 있으면 애틋함에 눈물이 난다... 함께 캠핑을 갈 때마다 왕발이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한껏 들뜬 게 눈에 보인다. 열심히 우리 텐트를 치는 게 아니라 어깨네 텐트를 먼저 쳐준다. 캠핑 가서는 둘이 화장실도 같이 간다. 그럼 장금 씨와 나는 뭔가 버림받은 기분이 든다. 화양연화처럼, 바람난 배우자를 둔 두 사람의 만남 같은 느낌도 든다. 뭐 사실 그만큼 비참하지는 않지만 좀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다. 아니, 나도 친구랑 화장실 가는 거 초딩 때 끊었는데! 남은 장금 씨와 나는 "진짜 절절한 사랑이다. 어이없어!" 하면서 툴툴거린다. 어깨가 하도 왕발이를 좋아해서, 이 캠핑 크루의 카톡방 이름은 "왕.사.모"라고 지었다. 왕발이를 사랑하는 모임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반쯤 농락의 의미로 지은 라떼식 별칭이다.
왕발이는 캠핑 가서도 보통 나랑 있을 때는 소주를 많이 먹어야 반 병 정도만 먹는데, 어깨랑 캠핑을 가면 밤이 가는지 모르고 계속 먹는다. 매너 타임이 있기 때문에 무한정 먹을 순 없지만, 매너 타임이 별로 없는 캠핑장에 가서 내가 말리지 않는다면 둘이서 밤새 술을 먹을 것 같다. 이런 두 남자의 절절한 사랑은 그 둘의 과거를 알고 있는 내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약 5~6년 간을 대학과 병역 모두 함께 하며, 가족만큼이나 가까웠던 사이기 때문에. 과거와 달리 이렇게 각기 다른 도시에 떨어져 살게 되면서 고달픈 회사생활을 운운하며 술잔 기울이기 어렵게 된 시점에 사실 제일 고픈 건 친구이니까. 실상 함께 있던 시절의 성적표와 미래의 불안감을 나눴던 그 시기보다 지금 세상의 풍파를 맞고 있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에 친구라는 존재가 더욱 필요하고 목마른 걸지도 모른다.
왕발이와 결혼을 할 즈음의 어느 날부터 나는 서운한 게 생겼다. 대학 친구들 중엔 남사친이 많은데, 다들 나를 왕발이의 아내로 포지셔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왕발이한테 연락하고, 왕발이한테 축하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서 더 그들의 우정에 질투가 난 걸 수도 있다. 나도 친군데! (근데, 생일 선물은 잘 보내주니까 봐줄게) 지금은 깨달았다. 남자들의 사랑은 악개도 못 이긴다.
지금은 캠핑 가기 가장 좋은 가을 시절이다. 10월에도 넷이서 캠핑을 가기로 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호젓한 산속에서 어깨와 왕발의 눈물겨운 사랑을, 이번에도 참을성 있게 혹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련다. 나에겐 새로운 친구 장금씨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