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악개
악개. 악성 개인 팬 내지 악질 개인 팬을 의미.
아이돌 팬덤에서 그룹의 팬이 아닌 개인 멤버의 팬으로 최애만 생각하고 다른 멤버들을 까내리는 등의 행태를 보이는 전반적으로 부정적 의미의 슬랭.
하지만 최근 *김태호 피디, 유재석 악개설처럼, 우스갯소리로 희화하여 쓰이기도 한다.
(꺼져줘요 스피드웨건!)
매거진의 제목을 뭘로 할까 계속 고심하다가 "악개 일기"로 적었다. 파브르 곤충기처럼 "남편탐구기"도 생각해봤는데 영 재미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어그로를 끌어보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왠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적는다는 것이 악질 개인 팬 같아 보이는 우스운 느낌이라 그게 또 맘에 들어서 이렇게 정해봤다.
(아이돌 덕질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K-문화가 범람한 세상에 악개라는 말 정도는 나도 알지!) 사실 내가 생각하는 "악개"는 악질 개인 팬인데, K-팬덤에서 말하는 악개보다는 팬이긴 팬인데 악질 팬.. 사실상 사생처럼 상대방을 괴롭히는... 그런 팬인 것 같다.
나는 19년도에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했다. 서른을 어찌 저찌 넘기고, 둘 다 쥐뿔도 없이 결혼했다.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서른이 넘었는데도 둘 다 쥐뿔이 생길 생각이 없다는 걸 메타인지로 알아차린 나의 결정이었다.- 그래서 후다닥 결혼해버렸다. 대학 동기이고, 그로 인해 아직까지도 동창들에게 우리 둘의 결혼은 놀림거리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농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짧지 않은 연애를 거쳐 19년도 결혼을 했다. 축가는 맨날 학교 앞 "백악관 노래방"에서 새벽녘까지 영혼의 서비스를 받던 동기들이 불러줬다. 노래방 짬바가 보통이 아닌 건 알았는데, 파스텔톤 양복을 둘이 맞춰 입고 불러줬던 폴 킴의 노래는 결혼식의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 같다.
이왕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으니, 우리 왕발이를 소개해보기로 하자. 솔직히 말하면 악개는 내가 아니라 왕발이다. 아참, 왕발이라는 별명은 실제로 입 밖으로 "왕발아!"하고 부르는 별명은 아니지만, 내가 글을 쓸 때 등장하는 남편의 별칭이다. 실제 발의 세로 사이즈는 275mm 남짓인데, 발이 엄청나게 두툼하고 발볼이 엄청나게 넓어 285~290mm 신발이 아니면 신지 못하는 평발을 가졌다. 나는 세상에서 발이 그렇게 두툼한 사람은 처음 봤다. 그래서 "호빗"이라는 별명도 생각해봤는데 호빗은 키가 작다는 의미로 여러모로 왕발이가 두 번 기분 나쁠 것 같아 끝끝내 왕발이로 정했다.
왕발이는 발이 큰만큼 마음도 넓다. 넓은 건지, 넓으려고 노력하고 속으로는 썩어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한 13년 가까이 모인 빅데이터로 봤을 때, 왕발이는 실제로 마음이 넓은 것 같다. 단순한 남사친 여사친 사이었을 때도 항상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항상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10여 년을 알아온 사람도 결혼하고 알게 되는 것들이 있더라. 왕발이는 알고 보니 나에게 유독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한결같이 노력해줘서 참 고마운 사람이다. 가끔 쪼잔한 타이밍도 있는데, 나 같은 경우 아주 자주 쪼잔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봤을 때, 왕발이를 만난 건 괜찮은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로또라고 썼다가 자존심 상해서 "괜찮은 행운"으로 고쳐 썼다.) 나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인데 걔는 안 그렇다. 내가 이런 나의 모난 모습을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왕발이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걔는 그런 나의 모습을 이해해준다. 내가 욕을 하면 들어주고, 칭찬을 원하면 칭찬을 해주고, 때로는 객관적으로 판단해줘서 쫌 빡칠 때도 있는데, 어쨌든 뭐 그것도 내가 예민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미리 말하면 재미없기 때문에 왕발이 소개는 일단 여기까지로 하자.
앞으로 나는 왕발이와의 일화들, 에피소드들, 그리고 가끔은 맥락 있는 결혼 이야기를 여기에 쓰고 싶다.
누군가 읽고 결혼이 나쁜 것만은 아니네~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나는 여기에서 남편을 '남편', '왕발이', '너', '걔'로 부를 거다. 남편한테 걔가 뭐냐!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자유연애의 산물로 결혼을 했다. 나에게 너라는 호칭이나 걔라는 호칭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이 아닌 동반자이자 친구라는 의미가 더 크다. 그렇게 우리는 도원결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