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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나 Aug 29. 2023

산너울에 두둥실

4. 죽은 엄마와 늙은 엄마



  드디어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새아빠는 내게 커다란 리본이 달린 빨간 구두와 흰 타이즈를 사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신고, 외할머니가 오래된 재봉틀로 만들어낸 연노랑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소매 부분이 호박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른 모양이었고 목둘레와 치맛단 끝에 흰색 레이스가 달려 있어서, 마치 만화에 나오는 귀여운 소녀들이 입는 옷처럼 보였다.

  학교는 집에서 십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새아빠가 내 손을 잡고 걸어서 학교에 바래다주었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도 하얗고 잘생긴 새아빠는 그날따라 멋진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아주 자랑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받는 공주가 된 기분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실은 긴장을 해서 배가 살살 아프긴 했지만, 등굣길의 아이들이 모두 우리를 부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쯤은 참을 수 있었다.


  “친구들 많이 사귀고, 공부 열심히 해야 돼. “ 새아빠는 턱을 끌어당기고 눈을 크게 뜬 채 어른스럽게 말하면서 내 다짐을 받아내려고 했다. 나는 속으로 ‘그런 건 일도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씩씩하게 교문을 들어섰다. 나는 2학년 7반이 되었고, 전학을 간 것이었긴 하지만 어차피 새 학년 시작과 동시에 간 것이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과 마찬가지로 나는 학급에서 꽤나 활발하게 지냈다.  


  하루는 학교를 파하고 나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학교 뒷마당에서 신나게 고무줄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목을 들어서자마자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낌새가 이상하기에 후다닥 달려가 보니, 잔뜩 겁에 질린 얼굴에 땟국 자국투성이었다.

 

  “왜 그래? 얼굴은 왜 이래?”


  내가 붙잡고 다그치니 동생은 그때서야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학교 수업을 마치는 시간에 맞추어 나를 마중하러 우리 학교에 갔는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내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목 한가운데서 침을 질질 흘리는 시커먼 개와 맞닥뜨렸던 것이다. 겁이 나서 도저히 그 개 옆을 지나칠 수 없었던 동생은 급히 발걸음을 돌리려 했는데, 하필 그때 길을 가던 한 주정뱅이 아저씨가 ‘조그만 개새끼 한 마리가 뭐가 무섭다고 도망을 가? 얼른 그냥 지나가, 지나가!’ 라며 소리를 쳤단다. 그 바람에 동생은 벌벌 떨며 그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 순간 그 개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동생에게 돌진하여 종아리를 덥석 물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럽게 우는 동생을 달래며 빨간약을 찾아 물린 부위에 발라주었다. 생각 같아선 그 주정뱅이 아저씨를 쫓아가 따지고 싶었다. 동생이 어찌나 안쓰럽고 불쌍한지 나까지 눈물이 찔끔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시장에서 돌아온 외할머니는 상황 설명을 듣고는 혀를 차며 나에게 알로에 화분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두껍고 길게 자라난 알로에를 뚝 분질러 그 속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액체를 동생의 다리에 발랐다. 그러고는 껍질을 벗겨낸 알로에 속을 저며 내어 상처 부위에 대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으아아앙, 따가워!”


  동생이 울며 몸부림을 치자 외할머니는, '아이고! 이 미친 눔의 개새끼를 갖다가 조져놔야지. 뚝 혀, 할미가 이 개눔으 자슥 갖다가 그냥 혼쭐을 내 줄겨.' 하며 동생을 달랬다. 알로에의 시원한 수액이 상처에 스며들자 동생은 기분이 훨씬 나아진 모양인지 잠잠해졌고, 나는 수건을 적셔다가 동생 얼굴의 땟국을 닦아주었다. 너무 말라서 비실비실해 보이는 데다 얼굴도 하얗고 착해 뵈니까 이젠 개새끼까지 우습게 보는구나 싶어서 동생이 한없이 측은했다.


  “느이 엄마 느덜 나이 때는, 수업이 끝나고 나면은 맨 동무들이랑 모여서 고무줄놀이 하고 공기놀이 하느라 해가 꼬박 져도 집에 안 들어오고 그랬다. 언제는 한 번은 열 시가 넘어 기어 들어오다가 느이 외할아버지한테 호되게 매질을 당했는데 말여, 그러고도 담날 되면은 또 잘두 돌아 댕기는겨.”


  외할머니가 덧붙인 말에 나는 내심 뜨끔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늦게까지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날 저녁 외할머니는 며칠간 공들여 완성한 약과를 꺼내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손으로 잡으면 기름이 듬뿍 묻어나고, 달짝지근하고 쫄깃한 맛에 많이 먹으면 느끼하긴 해도 자꾸만 손이 가는 그런 약과였다. 우리는 대나무자리가 깔린 작은방에 엎드려 약과를 조금씩 베어 먹으며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학생 시절의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참 어려웠다. 엄마는 그때도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을까? 엄마는 그때도 화가 나면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곤 했을까? 혹시 그때도 엄마는 늘 금세 피곤해져서 이마와 허리를 짚곤 했을까?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약과를 한 손에 든 채 이미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화장대 서랍에서 낡은 사진을 하나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흑백 사진 속에 머리가 짧고 장난꾸러기 같은 남자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느이 엄마다. 얼매나 짓궂은지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읎었지.”


  나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그렇게 개구쟁이 선머슴 같은 아이였다니. 내가 아는 엄마는 항상 머리가 긴 가녀리고 힘없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대핵교를 댕기면서두, 글쎄 수업을 곧잘 빼먹곤 혼자서 책 읽고 약과 먹으면서 놀았다, 늬 엄마는.”


  외할머니의 까만 눈이 시큼해지는 것 같이 느껴져서 나는 일부러 엄마 사진만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외할머니는 늘 우리 둘의 손을 잡고 등교와 하교를 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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