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에는 명백한 오류임에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예가 여럿 있다. 다음 예도 오류임이 명백한데도 60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민법에 버젓이 남아 있다.
'채무자가 이의를 보류하지 아니하고 전조의 승낙을 한 때에는'이라고 했다. '이의(異議)'는 '다른 의견이나 논의'라는 일반적인 뜻 외에 법률 용어로 '민법에서, 타인의 행위에 대하여 반대 또는 불복의 의사를 표시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일반적인 뜻과 법률 용어로서의 뜻이 서로 통해서 별로 다르지 않다. 문제는 '보류하지'이다. '이의를 보류하지 아니하고'는 무슨 뜻인가? 국어사전에 '보류(保留)하다'는 '어떤 일을 당장 처리하지 아니하고 나중으로 미루어 두다'라고 뜻풀이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의를 보류하지 아니하고'는 '이의를 미루어 두지 않고'라는 뜻이니 '이의를 제기하고'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하고'와 이어지는 '전조의 승낙을 한'은 서로 모순된다. 이의를 제기하면서 승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민법 제451조 제1항의 '채무자가 이의를 보류하지 아니하고 전조의 승낙을 한 때에는'은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법조계에서는 지난 60년간 이 조항을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써 왔다. '이의를 보류하지'를 '이의를 제기하지'의 뜻으로 써 왔던 것이다. '보류하다'에는 '제기하다'의 뜻이 없는데도 그렇게 해 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민법의 국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법조문이야말로 국어 용법을 가장 잘 지켜야 한다.
민법에서는 제639조 제1항, 제662조 제1항, 제678조 제4항에 '이의를 하다'라는 낯설고 생소한 표현을 쓰고 있다. '이의를 하다'는 일상 언어생활에서 잘 안 쓰는 말이므로 민법에서도 '이의를 제기하다'라고 했으면 좋았겠지만 민법 제451조 제1항의 '이의를 보류하지 아니하고'는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고'라고 하든지 최소한 제639조 제1항, 제662조 제1항, 제678조 제4항에서처럼 '이의를 하지 아니하고'라고 해야 한다. '보류하다'를 '제기하다', '하다'라는 뜻으로 쓰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명백한 잘못이다. 명백한 잘못은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다음 제145조의 '이의를 보류한' 역시 잘못이므로 '이의를 제기한'으로 바꾸어야 한다.
'사퇴하다'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은 '사퇴하다'를 '어떤 일을 그만두고 물러섬' 또는 '사절하여 물리침'이라 뜻풀이하고 있다. '의원직 사퇴', '공직 사퇴', '후보자 사퇴' 등은 '사퇴'의 가장 흔한 쓰임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 물러날 때 보통 사퇴한다고 한다. 그런데 민법에서는 '사퇴하다'를 매우 특이하게 쓰고 있다. 제927조를 보자.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사퇴할 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권리를 사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리는 포기하거나 버릴 수 있다고 하지 사퇴할 수 있다고 하는 일은 좀체 없다. '권리를 사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민법에서만 쓰는 낯선 용법이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문맥에 맞는 알기 쉬운 단어를 사용하는 게 낫다. 그래야 조문의 뜻이 모호하지 않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포기할' 수 있다고 하면 알기 쉽다.
제1094조에서도 '사퇴하다'가 쓰이고 있는데 역시 매우 낯설고 어색하다.
'위탁을 사퇴할 때에는 이를 상속인에게 통지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권리를 사퇴한다'처럼 '위탁을 사퇴한다'도 매우 생소하다. 위탁을 수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는 '위탁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제1097조에서도 '사퇴하다'가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도 역시 '사퇴하다'는 어색한 느낌을 준다.
'이를 승낙하거나 사퇴할 것을'에서 '이'란 '지정에 의해 유언집행자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정에 의해 유언집행자가 되는 것을 '승낙'한다고는 해도 지정에 의해 유언집행자가 되는 것을 '사퇴'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 문맥에서는 '사퇴할' 대신 '거부할'이라고 해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민법 제1105조에서도 '사퇴하다'가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도 '사퇴하다'는 문맥에 잘 맞지 않는다.
'유언집행자는 그 임무를 사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권리를 사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듯 '임무를 사퇴하는' 것 역시 매끄럽지 않다. 앞에서 '사퇴하다' 대신에 문맥에 따라 '포기하다', '거부하다' 등으로 쓸 수 있다고 했는데 제1105조에서는 '면하다'가 더 나아 보인다. 일반 국민의 언어 감각에 맞지 않는 생경한 단어를 쓰기보다는 일상 언어에 가깝게 단어를 골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자문(諮問)'에 대해 살펴보자. '자문'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말이다. '자문'은 사전상으로는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는 것을 가리키는데 현실 언어생활에서는 전문가가 의견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흔히 쓰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의 뜻풀이와 언어 현실에서의 용법이 다르다. 그런데 민법 제912조에 '자문'이 쓰이고 있다.
2011년 5월 19일에 신설된 제912조에 따르면 제2항에 '가정법원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나 사회복지기관으로부터 자문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자문'에 대해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기구에 의견을 물음'이라고 한 국어사전의 뜻풀이와 맞지 않는다. '물음'은 할 수 있을지언정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문을 받을'은 앞에서 본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임무를 사퇴하다'와는 달리 일상 언어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그러나 아직 그 용법이 국어사전에 반영되지 않고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낫다고 여겨진다. '자문을 받을' 대신 '의견을 들을'이라고 하는 것이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