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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Sep 11. 2019

나열

민법 제197조는 제목부터 몹시 낯설다. '점유의 태양'이란 말을 보자마자 바로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란 말이 '생긴 모습이나 형태'란 뜻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겟는가. 그런 뜻의 '태양'은 국어사전에 수록되어 있을 뿐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제목은 그렇다 치고 조문을 살펴보자. 


제197조(점유의 태양) ①점유자는 소유의 의사로 선의평온 및 공연하게 점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점유하다'는 '~을 점유하다'로 쓰이는 말인데 목적어에 해당하는 '~'이 없는 것부터 어색한 느낌을 준다. 무엇을 점유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점유의 대상이 아니라 점유의 모습이기 때문에 목적어는 생략되었다고 이해하기로 하자. 그런데 점유의 모습을 가리키는 '선의평온 및 공연하게'는 정상적인 한국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저히 그렇게 볼 수 없다. '평온'의 경우는 이어서 나오는 '공연하게'에 '하게'가 있으므로 '평온하게'의 '하게'를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선의'는 '선의하게'란 말이 아예 없으므로 도저히 이 맥락에서 쓰일 수 없는데 쓰였다. 그럼 어떻게 고쳐야 말이 되는가. '선의로 평온 및 공연하게'라고 하든지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의로 평온하고 공연하게'라고 할 때에 비로소 정상적인 한국어 표현이 된다. 나열할 때 문법을 지켜서 나열해야지 대충 말을 늘어놓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민법 제197조는 다음과 같이 바로잡아야 한다.


제197조(점유의 태양) ①점유자는 소유의 의사로 선의로 평온하고 공연하게 점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민법 제197조 제1항은 '선의평온 및 공연하게 점유한'이라 되어 있는데 '선의로 평온하고 공연하게'라고 해야 반듯하게 나열한 표현임을 보았다. 민법 제245조의 나열도 마찬가지로 바르지 않다. 제245조 제2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제245조(점유로 인한 부동산소유권의 취득기간) 

②부동산의 소유자로 등기한 자가 10년간 소유의 의사로 평온, 공연하게 선의이며 과실없이 그 부동산을 점유한 때에는 소유권을 취득한다.


'선의이며 과실없이 그 부동산을 점유한 때에는'이라고 하였다. '선의이며'와 '과실없이'가 나란히 이어질 수 없는데 이어졌다. '과실없이'에는 '없-'이라는 형용사 어간에 부사화 접미사 '-'가 연결되었다. 그렇다면 '과실없이' 앞에 나오는 말도 부사화 접미사 '-'가 연결될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러나 앞에 나오는 '선의이-'에는 부사화 접미사 '-'가 연결될 수 없다. '선의이-이'란 말은 있을 수 없고 '선의이-게'란 말조차 어색하다. 따라서 '선의이며 과실없이'처럼 나열되어서는 안 된다. '선의 과실없이'라고 할 때 비로소 '선의'와 '과실없이'가 연결될 수 있다. 즉, 다음과 같이 써야 반듯하게 된다.


제245조(점유로 인한 부동산소유권의 취득기간) 

②부동산의 소유자로 등기한 자가 10년간 소유의 의사로 평온, 공연하게 선의 과실없이 그 부동산을 점유한 때에는 소유권을 취득한다.


'선의이며 과실없이'가 사용된 다음 제246조 제2항, 제249조도 마찬가지다. '선의이며 과실없이' 대신 '선의로 과실없이'라고 해야 한다.


제246조(점유로 인한 동산소유권의 취득기간) 

②전항의 점유가 선의이며 과실없이 개시된 경우에는 5년을 경과함으로써 그 소유권을 취득한다.


제249조(선의취득) 평온, 공연하게 동산을 양수한 자가 선의이며 과실없이 그 동산을 점유한 경우에는 양도인이 정당한 소유자가 아닌 때에도 즉시 그 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한다.


'선의이며'와 관련하여 제470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470조는 다음과 같다.


제470조(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는 변제자가 선의이며 과실없는 때에 한하여 효력이 있다.


'선의이며 과실없는 때에 한하여'라고 하였는데 이때에는 '선의인 때와 과실없는 때에 한하여'가 줄어서 '선의이며 과실없는 때에 한하여'가 된 것이므로 '선의이며 과실없는 때에 한하여'는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선의이며 과실없이'와 '선의이며 과실없는'은 다르다. 제245조 제2항, 제246조 제2항, 제249조는 잘못되었지만 제470조는 바르다. 말은 이렇듯 미묘하고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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