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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Feb 21. 2016

50대 사나이의 전국 해안 자전거 일주 - 13일차

2015.  8.  11  법성 -> 군산

영광군 법성면 > 영광군 홍농읍 > 고창군 상하면 > 고창군 해리면 > 고창군 심원면 > 고창군 > 고창군 부안면 > 고창군 흥덕면 > 부안군 줄포면 > 부안군 보안면 > 부안군 진서면 > 부안군 변산면 > 군산시   

 


이제 예정대로라면 13일차인 이 날을 포함하여 사흘만 달리면 서울에 도착한다. 종반에 다다른 것이다. 아침에 법성포의 모텔에서 일어나 출발한 때가 7시쯤 됐다. 더 일찍 출발하고 싶었지만 피곤한 몸이 도저히 일찍 깨지지 않았다.


법성포는 참 묘한 동네다. 지리적으로 그렇다. 포구라서 갯벌이 깊숙이 들어와 있고 가운데 물 흐르는 데로는 동력선이 빠르게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시내는 온통 굴비집 천지... 한 귀퉁이에 백제불교최초도래지가 있었다. 지도에는 도래지 안에도 길이 있는 걸로 돼 있었으나 정작 가보니 계단뿐이고 차는 갈 수 없었다. 나는 자전거로 가는 중이니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가볍게 자전거를 들고 후문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도래지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 이렇게 웅장한 건물을 지었을까 싶게 매우 웅대한 시설이 지어져 있었다. 보통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구조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고 관리인인 듯 보이는 이가 청소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서기 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동진을 거쳐 이곳 법성포에 와 불교를 포교했다니 자그마치 1600년 넘은 까마득히 오래 전 일이다.

도래지 정문으로 나와 이 날의 일정을 시작했다. 길은 호젓하고 조용했다. 굽은 길을 한참 지나니 거대한 조선소 앞이 나타났다. 도크가 세워져 있었다. 거길 지나 언덕을 넘으니 마을이 나타나면서 ‘어서 오십시오. 가마미해수욕장입니다’라는 간판이 서 있었다. 계마항삼거리였다. 가마미가 곧 계마가 아닌가 싶었다. 그곳의 수퍼에 들러 잠시 쉬었다. 주인이 매우 나를 경계하는 듯하다. 그냥 평범한 손님일 뿐인데 왜 그러는 건지...

해수욕장 마을을 지나 언덕을 넘어 계속 달렸다. 그곳을 지나자마자 길가로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원자력발전소였다. 긴 담을 돌아서 정문쪽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얼마나 활기찬 거리가 나타나는지 깜짝 놀랐다. 마침 출근 시간이라 그랬겠지만 관광버스가 끊임없이 줄지어 도착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엄청난 사람들... 개인 승용차 행렬도 끝이 없었다. 발전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근무하는구나. 놀랐다.


버스와 승용차는 출근을 위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는 반대 방향으로 꾸준히 달렸다. 달리는 도중에 길 오른편에 큰 돌이 우뚝 서 있었는데 ‘프로골퍼 신지애 선수의 고향’이라 씌어 있었다.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였다.

해안길로 가야 하기 때문에 도중에 작은 길로 빠졌다. 진덕리에서 좌회전해서 한껏 조용한 시골 농로를 달렸던 것이다. 다행히 도로 끝에 표지판이 있어서 고창, 구시포라 된 좌측길로 꼬부라져서 방조제를 지났고 신작로(733번 지방도)를 만나 자룡리 지나서 조금 더 가니 구시포항과 구시포해수욕장이 있는 구시포마을이었다. 전라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왔다. 영광군에서 빠져나와 고창군으로 접어들었다.

구시포마을부터는 해안으로 일직선 도로다. 바로 해변이 나타난 것은 아니고 송림 사이에 길이 나 있었다. 명사십리 표지판이 보였다. 도처에 명사십리가 있으니 명사십리는 한두 군데가 아니다. 어인 일인가. 얼마 더 달리니 해변이 나타났는데 훈련중인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륙정 보트도 보였다. 일직선으로 얼마나 더 달렸는지 모른다. 꽤나 긴 거리를 직선으로만 달렸다. 동호해변을 지나서야 비로소 육지쪽으로 길이 꺾였다.

그리고 곧 골프장이 나타났다. 골프장 바로 옆으로 길이 나 있어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 웃음소리가 다 들렸다. 골프장을 지나니 ‘서해안바람공원’이라는 간판이 나타났다. 갯벌체험마을도 지나고 심원면에 이르렀다. 심원면에서도 수퍼에서 쉬었고 그 이후로 언덕 없는 평탄한 길을 한참 달렸다. 오른쪽으로는 높은 산이 우뚝 서 있었는데 선운산이었다. 심원면에는 복분자를 파는 데도 많았지만 ‘장어셀프’라는 간판이 걸린 장어집도 많았다. 그곳이 바로 풍천장어가 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심원면 하전리였다.

삼거리가 나타났다. 용선삼거리였다. 용선교도 건너서 얼마 더 달리니 미당시문학관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미당선생의 생가가 부근에 있었다. 거기 또 삼거리가 있어 좌회전해서 줄포 방향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인촌 김성수 수당 김연수 선생 생가라는 표지판이 부안면 봉암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그곳을 지나 줄포로 가기 위해서는 길을 잘 살펴서 가야 했다. 길이 워낙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었기에... 부안군 수앙리를 거쳤는데 다리를 건너 국악인 만정 김소희 생가가 있는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마을 앞을 지나 후포리를 거치고 신덕리로 넘어갔다. 이제 줄포가 차츰 가까워지고 있다. 언덕을 한두 개 넘으니 줄포면이 나타났다. 꽤 번화한 곳이었다. 고창군에서 부안군으로 넘어왔다.

점심 때가 되어 식당을 찾았다. 백반을 사먹는데도 푸대접을 받았다. 혼자지만 큰 선심을 써서 주는 거라면서... 그런데 어떤 아는 사람이 혼자 들어왔을 때는 군말없이 밥을 내주었다. 씁쓸했다.


부안군의 대부분은 변산반도가 차지하고 있다. 줄포는 부안군의 가장 남쪽이자 동쪽 끝이다. 23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향해 보안면 소재지의 영전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30번 국도로 바꾸어 탔다. 이제 서쪽으로 간다. 곰소항으로 빠지는 연동삼거리 갈래길에서 멈췄다. 길모퉁이에 시선을 끄는 커피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멈추고 그리 들어갔다. 개업한 지 얼마되지 않은 집 같았다. 인테리어가 서울의 인사동풍이었고 가게 이름에도 인사동이 들어가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마치 그 옛날 정승집에라도 들어온 듯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냉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왔다. 젊은 부부가 함께 경영하는 모습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듯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곰소항은 들르지 않고 서쪽으로 달려 내소사로 가는 석포삼거리를 지났다. 석포삼거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격포쪽으로 가는데 오르막내리막이 이어지면서 바다가 발 아래 펼쳐져 있다. 백수해안도로에 버금가는 절경이다. 과연 경치에 걸맞게 곳곳에 펜션이 지어져 있었다.


격포를 들르지 않고 내륙으로 변산에 갈 수 있는 마동삼거리도 지났다. 국립변산휴양림 입구도 지났다. 바다쪽으로 뻗어져나온 곳마다 휴양지가 지어져 있었다. 대기업 연수원이니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족호텔이니... 이제 격포항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격포항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쳐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전국 일주를 하면서 격포항에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결국 국도에서 나와서 격포항으로 향했다.

격포항은 대단히 번성한 항이었다. 격포터미널 앞 격포교를 건너자 격포삼거리가 나왔다. 채석강이 가까우니 더욱 화려하다. 모텔, 유스호스텔, 음식점 등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채석강을 찾아 접근해가니 바닷가에 바위가 삐죽삐죽 삐져나온 곳이 채석강이었다. 관광객이 여간 들끓지 않았다. 혼잡한 그곳을 빠져나와 길을 재촉했다.

격포해변의 그 어지러움도 조금만 벗어나니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차들도 가끔 달릴 뿐이고 탁 트인 바다 풍경은 가히 일품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서서 바다 경관을 응시했다. 변산반도가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안고 있을 줄이야...

해변을 따라 한참을 달리도록 한참을 한 섬이 바다 가운데 버티고 있었다. 하섬이었다. 바다가 갈라지고 바다길이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비록 바다 저 멀리 있는 섬이지만... 언제 바다길이 열릴까. 꼭 한번 다시 와보고 싶다.

운산교차로에서 변산면을 우회하기 위해 넓은 우회도로로 들었고 그 도로 끝인 변산교차로에서 좌회전해서 30번 국도를 탔다. 그 부근에서 관광지를 조성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고 멀리 새만금방조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새만금방조제 입구가 나타났다. 길이가 34킬로라 했다. 실로 엄청난 거리다.

5시 13분에 새만금방조제 남단에 진입했다. 시속 30킬로 정도의 빠른 속도로 달렸다. 길은 편도 2차로에 갓길이 넓었으며 그 바깥에 자전거길이 또 따로 있었다. 처음엔 자전거길을 못 알아보고 차도로 들어가 갓길을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섬인 가력도가 나왔다. 가력도를 지나서부터 본격적인 방조제가 시작됐다. 정말이지 시속 30킬로라면 엄청난 속도인데 가도 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 같다. 아스라이 보이는 섬이 신시도이고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의 중간 지점일 뿐인데 말이다.


30분쯤 그렇게 달렸을까.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뒷바퀴가 물렁물렁해지는 느낌이었다. 신시도 휴게 지역을 불과 몇 백 미터 앞두고 뒷바퀴는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다. 전날 무안에서 뒷바퀴 튜브를 교체했는데 겨우 하루만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5시 46분에 발생한 일이었다. 마침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7월 30일 시작한 여행에서 13일만에 맞는 비였다. 비를 맞으며 터덜터덜 걸었다. 신시도 휴게 지역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자전거를 고쳐야 한다. 비록 몇 백 미터밖에 안 되지만 왜 그렇게 처량하고 거리가 금세 좁혀지지 않는지! 더구나 내 왼쪽 발목은 이태 전에 다친 이후로 통증이 가시지 않은 채다. 게다가 이번 자전거여행을 위해 자전거를 반(半)클릿 페달로 바꾸면서 그에 맞는 신발을 샀는데 그게 바닥이 매우 울퉁불퉁해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편하지 않고 발바닥이 아프니 비록 몇 백 미터지만 여간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악조건이라 걸음이 빠르지 못했고 거의 20분만에 화장실이 있는 신시도 휴게소 지역에 이르렀다. 6시 5분께부터 야외 벤치가 있는 곳에 앉아 수리에 돌입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뒷바퀴를 떼어내고 나사를 풀어 튜브를 끄집어냈다. 아마 분명 어딘가에 펑크가 났을 것이다. 새 튜브를 꺼내서 타이어 속에 집어넣었다. 맨손으로 타이어 안을 몇 번이나 훑어서 만져 보았으나 뾰족한 이물질 같은 건 감지하지 못했다. 새 튜브를 타이어 속에 간신히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펌프를 꺼내서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며칠 전 감포 부근에서 땡볕에서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튜브에 바람 넣던 일이 생각났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넣어도 넣어도 바람은 팽팽하게 들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수리 착수 한 시간만에 손을 들었다.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7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114로 전화를 걸어 콜택시 회사 번호를 물었고 알려주는 대로 전화를 걸어 새만금방조제 한가운데 농어촌공사 앞이니 와달라 했다. 전화받는 사람이 말하건대 수분 안에 도착할 거라 했다. 어찌 그렇게 빨리 도착할까 의아했는데 혼선이 있었다. 그녀가 이해하는 농어촌공사는 군산 시내에서 새만금방조제 들어갈 때 초입에 있는 농어촌공사였고 나는 그곳이 아닌 새만금방조제 한가운데 신시도에 있는 농어촌공사였다. 그 때문에 다시 기다려야 했다.

콜택시를 비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에 오색무지개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내 생애에서 본 적이 없다. 감탄이 절로 나왔고 내 손은 스마트폰을 꺼내고 있었다.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엄청나게 큰 반원이 하늘에 그려져 있었다.




곧 택시가 도착했다. 자전거 앞바퀴는 이미 분리해 떼어놓았고 자전거를 뒷좌석에 실었다. 방조제 34킬로의 반인 17킬로를 달려 군산 시내로 향했다. 해는 완전히 졌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구름 속에 잠긴 해가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도 그 광경이 장엄해 하마터면 거의 비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기사가 말했다. 아까 올 때는 더 대단했다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노을이 그렇게 화려하고 장엄한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천지창조를 보는 느낌이었으니까.

택시기사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한 줄 모르고 군산 시내로 들어왔다. 나보다 좀 연상인 듯한 그는 술도 담배도 않는다 했다. 운동을 좋아하는데 달리기를 하며 배드민턴도 즐긴다 했다. 어쩌면 나와 그렇게 비슷한지! 비록 지금 나는 발목 때문에 그런 운동을 못하지만...


군산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군산항은 참으로 번성했다고 한다. 그도 직접 겪은 일은 아니고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일제가 호남평야의 곡물을 수탈해서 군산항을 통해 실어갔단다. IMF 때조차도 군산은 별 동요가 없었으니 군산이 농업, 어업, 공업이 골고루 다 번성한 곳이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군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려다준 곳은 소룡동의 한 자전거가게 앞이었다. 마침 가게는 아직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 자전거가게에서 뒷바퀴 튜브를 갈았고 타이어를 보더니 많이 닳았다 하기에 타이어까지 갈아달라 했다. 무안읍에서 자전거가게 아저씨가 이 타이어로 서울까지 가겠느냐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일이 생각나서였다. 소룡동 자전거가게 아저씨는 내 펌프를 보더니 비싸기만 하고 바람은 잘 안 들어갈거라면서 펌프를 하나 권했다. 만 원인데 발로 넣는 거라며 바람이 아주 잘 들어간다 했다. 기꺼이 그것도 구입했다. 말끔히 자전거를 수리해서 나왔다. 그에게 버프 하나를 서비스로 달라 하니 흔쾌히 내주었다.


오후 5시 46분 뒷바퀴가 주저앉기 전까지는 하루 종일 즐겁게 탔다. 사타구니 아픈 것도 이 날 처음으로 거의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날씨도 처음으로 매우 선선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뭐 하나 불편한 게 없이 잘 달린 하루였다. 처음으로 비가 좀 왔지만 별로 많이 온 건 아니어서 달리는 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경치는 또 얼마나 근사했나... 이런 행복도 오후 5시 45분에 아작이 나고 말았다. 한 시간의 수리도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콜택시를 불러 타고 시내로 가서 꽤 돈을 들여서 고칠 수 있었다. 택시를 부를 수 있어서 다행이지 깊은 산골에서 그랬다면 어쩔 뻔했나. 위기를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고치느라 시간을 너무 소비했다. 저녁을 먹어야겠어서 자전거가게 근처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그리고 잘 데를 찾아 나섰다. 소룡동에 찜질방이 있었는데 그날 따라 영업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넘어 나운동으로 넘어가니 그곳은 환락가였다. 대부분 술집, 모텔이었지만 찜질방 하나를 발견해내어 그리 들어갔다. 통영, 목포에 이어 세 번째로 들어가는 찜질방이었다.

   

거리 : 124km

누적 거리 : 1,650km

시간 : 7시간 45분

평균 속도 : 15.9km/h

최고 속도 : 49.9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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