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밭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중 Jun 07. 2021

재룟값?

맞춤법과 국어사전은 상식과 부합해야

텔레비전 자막을 보고 적지 않이 놀랐다. 자막에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김밥도 햄버거도 올라"...  더 오르면?


눈길이 멈추고 소스라치게 놀란 건 '재룟값'에서다. 듣도 보도 못한 '재룟값'이 어떻게 텔레비전 뉴스 자막에 나왔을까? 짚이는 데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휘발윳값', '채솟값' 같은 표기가 신문의 기사 제목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낯선 표기가 신문에 등장한 건 국어사전 때문으로 보인다. 인터넷 국어사전 중에 표준국어대사전엔 '휘발윳값', '채솟값'이 없지만 훨씬 더 많은 어휘가 수록된 '우리말샘'에는 '휘발윳값', '채솟값'이 있기 때문이다.


아, 그러니까 휘발윳값, 채솟값이니까 재룟값이라 했겠구나 싶었다. 이런 게 소위 학습효과란 거구나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재룟값'이란 말도 또한 우리말샘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게 아닌가. 학습효과 이전에 국어사전에 그렇게 올라 있었던 것이다.


국어학을 전공하지 않은 주위 일반인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재룟값'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재룟값'이 오타일 거라는 사람, 빨리 시정해야지 그냥 두면 혼란만 불러일으킨다는 사람, 국민 청원에 민원을 내야 한다는 사람 등 한결같이 '재룟값'에 대해 어이없어하는 반응이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일반인들의 상식과 동떨어진 '휘발윳값', '채솟값', '재룟값' 같은 표기가 국어사전에 오르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1988년에 고시된 한글 맞춤법 제30항이  관여하고 있다. 두 단어가 합해져서 합성어가 되었을 때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변하면 앞 단어의 받침에 사이시옷을 넣는다고 규정한 게 한글 맞춤법 제30항이다. 냇가, 햇빛, 횟집, 고갯길 같은 말이 다 그래서 사이시옷이 쓰였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냇가, 햇빛, 횟집, 고갯길을 만일 내가, 해빛, 회집, 고개길이라고 쓰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이런 말들에 사이시옷을 넣는 건 너무나 당연하여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사이시옷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말들에 사이시옷을 넣게 한 한글 맞춤법 제30항은 등굣길, 하굣길, 순댓국, 만둣국, 극댓값, 극솟값 같은 표기를 낳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솟과, 갯과, 멧돼짓과 같은 표기까지 낳았다. 냇가, 햇빛, 횟집, 고갯길은 당연하게 생각해도 등굣길, 순댓국, 극댓값은 거부감을 낳는 데도 불구하고! 솟과, 갯과, 은행나뭇과, 참나뭇과 등은 이른바 생물학 분야의 전문용어인데 이 분야에서는 소과, 개과, 은행나무과, 참나무과라고 하지 솟과, 갯과, 은행나뭇과, 참나뭇과를 쓰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글 맞춤법 제30항은 과도한 일반화를 함으로써 일반인은 물론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따르지 않는 괴물 같은 조항이 되고 말았다. 언어 질서를 편안하게 하기는커녕 언어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전통시장 어디서도 다 '순대국', '만두국'이라고 간판을 내걸지 '순댓국', '만둣국'은 볼 수 없었는데 최근 들어 가뭄에 콩 나듯이 '순댓국', '만둣국'이 나타나고 있으니 이런 혼란상은 오로지 한글 맞춤법 제30항 때문이다. 


다시 '재룟값'으로 돌아가보자. '재룟값'은 한글 맞춤법 제30항과 관련되어 나타난 표기임은 분명하지만 실은 한글 맞춤법을 잘못 적용한 사례이다. 사이시옷에 대해 규정한 한글 맞춤법 제30항은 어디까지나 합성어에 적용하라고 만들어 놓은 조항이다. 합성어란 무엇인가. 단어와 단어가 합해져서 새로운 '단어'가 된 말이 합성어이다. ''라는 단어와 ''이라는 단어가 합해져서 '횟집'이라는 합성어가 생겨났고 ''라는 단어와 ''이라는 단어가 합해져서 '햇빛'이라는 합성어가 생겨났다. 합성어도 단어다. 단어니까 국어사전에 오른다.


그런데 '재룟값'은 단어인가. 우리말샘 국어사전에 '재룟값'은 품사가 명사인 단어로 올라 있고 뜻은 '물건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의 값.'이라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재룟값'이 단어인가. '재룟값'이 명사인가.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판매되는 모든 물건은 값이 매겨진다. 그럼 모든 '물건 + 값'은 단어란 말인가. 합성어란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말샘 국어사전에는 극히 일부의 '물건 + 값'만 올라 있다. 오른 말은 왜 사전에 올라 있고 안 오른 말은 왜 안 올라 있나? 설명이 불가하다. '물건 + 값'은 합성어가 아니다. 단어가 아니다. 두 단어가 나열되었을 뿐이다. 이를 국어학 용어로 구라 한다. 한글 맞춤법 제30항은 합성어, 즉 단어에 적용하라고 만들어진 규정이지 구에 적용하라고 만들어진 규정이 아닐 것이다. '재룟값'은 마치 영어에서 'materialsprice'라고 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materials price'거나 'price of materials'이지 'materialsprice'는 상상도 못할 어이없는 표기이다. '재룟값'은 바로 그런 꼴이다.


필자는 단어에 적용하라고 만든 한글 맞춤법 제30항도 과도하다고 생각하지만 '재룟값', '휘발윳값', '채솟값'은 한글 맞춤법 제30항을 적용해선 안 될 말에 그것을 적용한, 규정 적용을 잘못한 경우이므로 한시바삐 국어사전에서 내려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도 텔레비전 뉴스 자막에 '재룟값', '휘발윳값', '채솟값'이 계속해서 오를 게 뻔하다.


과도한 사이시옷 적용 경향은 '막냇동생'이라는 표기까지 낳아서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막내+동생'의 발음은 그냥 [망내]이지 [망내]이 아닌데 표준 발음이 [망내]인 것처럼 간주해 국어사전에 '막내동생'은 없고 '막냇동생'이 올라 있다. 국민 언어생활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할 국어사전이 도리어 언어생활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례다. 


'재룟값'이 단어에 들어가야 할 사이시옷이 단어가 아닌 곳에 들어간 사례라면 '막냇동생'은 된소리로 발음되는 경우에 들어가야 할 사이시옷이 된소리로 발음되지 않는 말에 들어간 사례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이시옷을 넣지 못해 안달이 났는가. 지나친 사이시옷 남발은 국민의 언어생활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재룟값'은 단어가 아님에도 사이시옷을 넣은 예로서 '재료 값'이라 띄어써야 하고 굳이 붙여쓰고자 한다면 단어가 아니므로 사이시옷을 넣지 말아야 한다. '재룟값'은 당연히 국어사전에서도 내려야 한다.


맞춤법이든 국어사전이든 대중의 상식과 부합해야지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맞춤법, 국어사전이 없었다면 '멧돼짓과', '순댓국', '재룟값' 같은, 예상을 뛰어넘는 기막힌 표기는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