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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29. 2021

고깃값? 닭고기값?

한글맞춤법 제30항 사이시옷 조항이 불러일으키는 혼란

아침 신문 기사의 제목을 보고 내 동공이 커졌다. 기사 제목은 이랬다.


"역대급 폭염에 '열 받은' 고깃값... 소.돼지.닭고기값 다 뛰었다"


아니, '고깃값'은 뭐고 '닭고기값'은 뭔가? 그냥 '고기+값'일 때는 '고값'으로 사이시옷을 넣고 닭고기+값'일 때는 사이시옷 없이 '닭고값'이라니! 사람들은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있겠지만 언어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국어 관련 기관에서 종사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고 동시에 분노가 치솟았다.


'고값'과 '닭고값'은 병립할 수 없음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고값', '닭고값'이든지 '고값', '닭고값'이어야지 어찌 '고값', '닭고값'이란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고기값', '닭고기값'이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한다면 '고기 값', '닭고기 값'이어야 한다.


그럼 한 제목 안에서 어떻게 '고값', '닭고값'이 나왔을까? '고깃값'은 신문에서 언제부턴가 '휘발윳값', '채솟값'이라는 제목이 자주 사용되어 온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신문이 '휘발윳값', '채솟값', '고깃값'이라는 표기를 제목에 쓴 것은 온라인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 이런 말들이 표제어로 올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어사전은 '휘발윳값', '채솟값', '고깃값'을 표제어로 올렸을까. 이는 한글맞춤법 제30항 때문임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한글맞춤법 제30항은 사이시옷에 관한 규정으로 다음과 같다.


제30항 사이시옷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받치어 적는다.


1. 순우리말로 된 합성어로서 앞말이 모음으로 끝난 경우


(1)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는 것 

고랫재 귓밥 나룻배 나뭇가지 냇가 댓가지 뒷갈망 맷돌 머릿기름 모깃불 못자리 바닷가 뱃길 볏가리 부싯돌 선짓국 쇳조각 아랫집 우렁잇속 잇자국 잿더미 조갯살 찻집 쳇바퀴 킷값 핏대 햇볕 혓바늘

(후략)


국어사전에 '휘발윳값', '채솟값', '고깃값'을 올린 이들은 합성어의 앞말이 모음으로 끝나고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날 때 사이시옷을 쓰라고 제30항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한글맞춤법 제30항에는 사이시옷을 쓰는 조건으로 '합성어로서'를 명시하고 있는데 '휘발유+값', '채소+값', '고기+값'은 과연 합성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한글맞춤법 제30항의 예시어로 오른 '나뭇가지', '바닷가', '뱃길' 등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합성어, 즉 단어지만 '휘발윳값', '채솟값', '고깃값'은 '휘발유의 가격', '채소의 가격', '고기의 가격'이란 뜻으로서 '휘발유 값', '채소 값', '고기 값'으로 적어야 옳다. 합성어가 아니고 두 단어의 연쇄일 뿐이기 때문에 비록 뒤 단어가 된소리로 나더라도 사이시옷을 적을 대상이 아니다. '휘발윳값', '채솟값', '고깃값'은 한글맞춤법 제30항을 잘못 적용한 사례일 뿐이다. 적용해서는 안 될 것에 적용한 오적용 예이다.


모든 상품은 값이 매겨진다. '상품 + 값'을 두 단어가 아니라 한 단어인 합성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억지다. 만일 그런 식이라면 '양팟값', '팟값', '뭇값', '시금칫값', '오잇값', '배춧값', '고춧값', '가짓값', '열뭇값', '옥수숫값', '양배춧값', '참욋값', '사괏값', '뱃값', '양상춧값', '달랫값', '부춧값', '달랫값', '냉잇값', '도라짓값', '머윗값' 등등이 모두 국어사전에 올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말샘>에는 이런 말들이 대부분 올라 있지 않다. '채솟값', '배춧값'은 올라 있는데 왜 올랐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필자가 말하려는 바는 간명하다. '고깃값', '채솟값', '휘발윳값'은 국어사전에 잘못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올라가서는 안 될 말이다.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한글맞춤법 제30항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고기 값', '채소 값', '휘발유 값'이어야 한다. 신문은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야 하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고기값', '채소값', '휘발유값'으로 붙여쓸 수는 있을지언정 '고깃값', '채솟값', '휘발윳값'은 애초에 잘못되었다.


국어사전은 언어생활의 나침반 구실을 한다. 그런데 그 반대로 국어사전이 언어생활을 오도하고 있다. 국가기관은 두 가지 국어사전을 제공하는데 하나는 <표준국어대사전>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말샘>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채솟값', '휘발윳값', '고깃값'이 없는데 <우리말샘>에는 '채솟값', '휘발윳값', '고깃값'이 있고 심지어 '돼지고깃값', '소고깃값', '쇠고깃값'까지 있다. 국민은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라야 하나? 아니면 <우리말샘>을 따라야 하나?


이미 자세히 논술한 바와 같이 '채솟값', '휘발윳값', '고깃값', '돼지고깃값', '쇠고깃값'은 한글맞춤법 제30항을 잘못 적용한 것이다. '채소 값', '휘발유 값', '고기 값', '돼지고기 값', '쇠고기 값'이라야 한다.


한글맞춤법 제30항은 그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설령 합성어라도 사이시옷을 넣어서는 안 될 단어들이 적지 않게 있는데도 합성어에서 뒷말이 된소리로 나면 덮어 놓고 사이시옷을 넣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순댓국', '꼭짓점', '등굣길', '솟과', '갯과' 같은 해괴한 표기가 양산되었다. 자꾸 쓰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는 말로써 규범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무책임한 주장이다.


단어인 합성어 안에서도 사이시옷이 들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경우가 있고 들어가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경우가 있다. 따라서 합성어에서 뒷말이 된소리가 나면 무조건 사이시옷을 넣게끔 한 한글맞춤법 제30항은 애초에 무리한 규정이었다. 그러한데 단어도 아닌 예에까지 사이시옷을 마구 넣는 일이 횡행하고 있다. 한글맞춤법 제30항이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지금이라도 한글맞춤법 제30항 사이시옷 조항은 삭제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전국의 수많은 '순대국' 파는 집들이 한글맞춤법도 모르는 식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규정이 어떻게 국민을 이기려고 하나. 국민을 불편하게 하는 규정은 해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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