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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팔달산에 올라보니

by 김세중

수원 장안문, 팔달문을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본 적은 있었으나 정작 화성에 올라본 적이 없었다. 휴일에 마음을 냈다. 걸어서 둘러보리라 하고...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다. 그만큼 역사적, 문화적 의의가 깊다. 정조대왕 왕명으로 축성을 시작해 1796년 완성되었다. 그리고 200년 남짓 지나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왜 정조는 수원에 화성을 쌓고 거기에 행궁을 짓게 했을까. 아버지 사도세자와 관계 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왕이 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영조 사후 손자인 정조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아버지 생각이 떠날 리 없었다. 동대문구 배봉산 아래에 묻혔던 아버지의 묘를 정조 13년에 경기도 화산(현재의 융건릉)으로 옮겼다. 아버지 묘를 찾아 행차를 자주 하게 되면서 팔달산 아래에 행궁을 짓고 행궁 둘레에 성을 쌓게 되었으나 화성이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순식간에 수원에 닿지만 19세기에 임금의 수원 행차는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몇 날 며칠 걸렸으리라. 수많은 신하와 군졸들이 임금의 행차를 수행했다. 화성은 새로운 도읍이나 마찬가지로 단단하게 지어졌다. 북쪽에 장안문, 동쪽에 창룡문, 서쪽에 화서문, 남쪽에 팔달문이 세워졌다. 팔달산 꼭대기에는 서장대가 우뚝 솟았다. 정조는 몸소 그곳에 올라 시를 남겼다. 동쪽 멀리 동장대가 있다. 정조는 죽고 나서 아버지 묘 옆에 묻혔다. 건릉이었다. 융릉과 건릉을 합해 융건릉이라 한다. 어머니인 혜경궁홍씨 현경의황후는 아들인 정조보다 오래 살았는데 융릉에 합장되었다. 정조의 혼이 담긴 화성은 거중기라는 근대적 기계가 사용되어 축성됐다 한다. 그러나 6.25 때 처참하게 붕괴되었다. 1970년대 이후 꾸준히 복원되어 지금은 제법 옛 모습을 찾았다. 행궁은 지금도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수원역에서 내려 터덜터덜 팔달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수원중앙도서관 옆 산길로 오르니 곧 지석묘군이 나타났다.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수원의 역사가 깊음을 보여준다. 곧 서남각루에 다다랐다. 화양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근처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팔달산 정상에 이르니 2층 누각이 우뚝 서 있었다. 화성장대였다. 일명 서장대. 수원 시내가 발 아래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광교산 능선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화서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화성공심돈이 뾰족히 서 있었다. 화성을 지키는 초소였다. 장안문은 화서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서울의 사대문과 달리 수원의 장안문, 팔달문은 겹으로 되어 있었다. 문 앞에 다시 문이 있었다. 장안문에서 성곽을 따라 걷다 화홍문에 이르렀다. 참 아기자기했다. 징검다리를 건너 동장대, 창룡문 쪽으로 가볼까도 싶었으나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리고 화성행궁쪽으로 향했다. 동네 안길에 카페나 가게가 여간 많지 않았다. 심심할 틈이 없었다. 어느새 화성행궁 앞 광장에 이르렀다. 느티나무가 의연하게 서 있었다. 화성행궁신풍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갈까 망설이다 다음에 가기로 했다. 차근차근 보려면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았다. 팔달문으로 향했다. 차들이 끊임없이 밀려와 좀체 사진 찍을 틈을 찾기 어려웠다. 간신히 한 장 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수원은 인구가 120만이 넘는 대도시다. 수원특례시가 됐다. 얼마나 팽창했는지 모른다. 그 한복판에 수원화성이 자리하고 있다. 옛 모습이 꽤나 복원되어 있으니 여간 다행이 아니다. 6.25 때 장안문의 1/3쯤이 잘려나간 사진을 보고 전쟁의 참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정조대왕의 효심에 감탄하고 또 백성을 위하는 마음 또한 간절했다는 기록을 읽고 감동한다. 아직 팔달산에 올라보지 않았다면 한번 올라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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