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에 굴하지 않겠다?
언제부턴가 신문은 선생님이라는 구호를 많이 듣게 되었다. 신문을 열심히 읽으면 배우는 게 많다는 뜻이겠다. 과연 신문에서는 새로운 정보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고 세상을 보는 눈도 기를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신문이 선생님이려면 기사에 사용되는 말이 반듯하고 모범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문 기사에 의아함이 느껴지는 표현이 자주 보이니 안타깝다.
엊그제는 9.11 테러 22년을 맞는 날이었다. 한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항공기 네 대, 세 대라 했다. 예전에 학생 때가 생각난다. 국어 선생님은 자동차는 '석 대, 넉 대' 해야지 '세 대, 네 대' 하면 못 쓴다 하셨다. 종이도 '석 장, 넉 장' 해야지 '세 장, 네 장' 하지 말라 하셨다. 그 땐 왜 선생님이 저러시나 좀 의아했다. 굳이 꼭 그렇게 해야 하나 싶었다. 더 커 가면서 선생님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이왕이면 '세', '네'로 단순하게 통일하기보다는 '대(臺)'나 '장(張)' 따위에는 '석', '넉'이란 말을 쓰고 '말'에는 '서', '너'라는 말을 쓰는 게 더 말맛이 산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층에게 '네 대', '세 대' 하지 말고 '넉 대', '석 대' 하라고 하면 아마 왜 그래야 하냐면서 순순히 동의할 것 같지 않다. 꼰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말은 변하니까 '네 대, 세 대'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다음 예는 확실히 달라 보인다.
'우리의 사명에 굴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뜨악하다. '굴하다'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굴하다'는 '굽히고 꺽이는' 것을 뜻한다. 어떻게 우리의 사명에 굽히고 꺾이지 않겠다는 건가? 말이 안 된다. '우리의 사명을 잊지 않겠다'고 하든지 '우리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해야 할 것을 말을 잘못 했다. 기자들이 젊어지면서 말도 그들 감각에 맞는 말이 쓰이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틀린 말마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신문이 선생님이려면 최소한 중대한 오류는 없어야 한다. '항공기 네 대'는 사소한 오류거나 오류가 아닐 수 있어도 '사명에 굴하지 않겠다'는 중대한 오류다. 도대체 영어가 어땠길래 그렇게 번역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