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각축장이었다
어느 도시든 박물관이 있다. 그래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그런데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위치가 좀 그렇다. 지하철역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접근이 쉽지 않다. 제일 가까운 지하철역이 수인분당선 송도역인데 다시 버스를 타야 한다. 어떻든 교통이 불편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들어서 보니 볼 것은 많았다. 시기적으로는 구석기시대부터, 위치로는 강화도, 영종도까지 다 아우르는 인천의 역사가 펼쳐져 있었다. 仁川이라는 지명은 최초로 15세기에 나타났음을 알려주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들 비류가 이미 이곳에서 활동했지만 말이다. 시립박물관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 송도역에 이른 뒤 수인분당선을 타고 신포역에서 내렸다.
본격적인 구도심 탐방을 시작했다. 구도심은 곧 제물포였다. 신포시장을 지나 신포패션문화의거리에 이르니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서 있었다. 19세기말 20대 초 관헌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던 곳이 그곳이란다. 어머니와 나란히 백범이 서 있었다. 백범은 한일병합 후 다시 체포되어 그곳에 갇혔다니 인천과 백범 김구 선생은 상당한 인연이 있다. 백범김구 역사거리를 지나니 고풍스런 건물이 언덕에 있었다. 성공회 내동교회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터널 위를 지나게 됐는데 터널이 바로 홍예문이었다. 구시가와 동인천을 잇는 터널이 곧 홍예문이다.
능선길을 따라 걸으니 오른편으로 시내가 펼쳐져 있었고 산속에 있는 학교는 유서 깊은 제물포고등학교였다. 그리고 곧 자유공원에 이르렀다. 처음 맞닥뜨린 인천학도의용대호국기념탑은 1951년 초 6.25 전쟁 중에 자진 입대했다 산화한 학생들의 넋을 기리는 탑이었다. 조금 올라가니 새들을 가둬 둔 새장이 있었고 그걸 지나 맥아더장군 동상을 만났다. 자유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공원으로 만들어졌는데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은 1957년에 붙여졌단다.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더 오르니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이 뾰죽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한미수교는 1882년에 있었고 1982년에 세워진 탑이었다. 이곳은 응봉산 정상으로 20세기초 제임스 존스턴의 별장이 있었는데 이 별장은 당시 인천의 랜드마크라 할 정도로 빼어난 건물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소실되고 지금은 대신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이 들어서 있다.
응봉산에서 내려오다가 한옥이 두 채 있다. 연오정(然吾亭)은 육각정이고 그 밑의 석정루(石订樓)는 2층 정자다. 석정루에서 내려다보는 인천항 광경이 제법 볼만하다. 자유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응봉산이 그리 높지는 않아도 제법 경사가 져서 입체감이 풍부하다. 도중에 차이나타운 음식점가로 내려오는데 선린문(善隣門)이 서 있었다. 갑자기 시끌벅적했다. 차이나타운의 음식점거리였다. 연경대반점, 청관, 공화춘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 그 규모가 상당하다. 점심을 먹어야겠다 싶어 공화춘으로 들어가니 3층으로 가라 했다. 전에도 온 적이 있었지만 이리 넓은 줄 몰랐다. 방마다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아마 직원이 수십 명은 될 듯하다. 이건 식당이 아니라 기업 같다. 삼선볶음밥을 주문했는데 시장이 반찬인지라 깨끗하게 비우고 나왔다.
차이나타운 음식점거리는 여간 북적이지 않았다. 터키 남자가 뭐라 뭐라 떠들며 먹거리를 만들며 팔고 있었는데 여간 붐비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에 자리를 잡은 터키 남자는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었다. 이곳이 아니면 잘 볼 수 없는 먹거리도 많다. 특히 공갈빵이 그렇다.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 짜장면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옛날 공화춘 건물이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짜장면은 산둥반도 출신의 노동자들인 쿨리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 했다. 면을 익힌 뒤 춘장을 얹어서 비벼 먹는... 짜장면박물관은 볼거리가 제법 많았다. 그들만의 독특한 주방 칼도 특이했고 짜장면의 종류도 여간 많지 않았다.
한중문화관으로 갔다. 화교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중국문화를 자랑하는 전시관이 이리도 규모가 크다니! 반면에 일본의 흔적은 그저 건물밖엔 없었다. 한국사람이 중국문화에 대해서는 친근감을 느끼고 관용적이지만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수용적이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곳곳에 관우의 흔적이 있었고 공자상이 있는가 하면 화교역사관 옆에는 벽에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의 상이 조각돼 있었다.
한중문화관 동쪽으로 유서 깊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대불호텔전시관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있던 자리에 위치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세기 당시의 건물은 아닌 듯한데 대불호텔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 구실을 하고 있다. 그 골목에 있는 인천개항박물관,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 등은 한눈에 보아도 유서 깊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모두 일인들이 세운 은행 건물들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자유공원 아래에 제물포구락부로 갔다. 그곳은 건물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갤러리였다. 목판화가 전시되고 있었다. 건너편에 한옥의 옛 인천시장 관사가 있었다. 이름하여 인천시민愛집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니 인천시중구청 어린이집 건물이 매우 큼직했고 좁은 골목으로 빠져나오니 인천시중구의회와 인천시중구청이었다. 그래서 얼추 인천의 구도심을 훑어보았다.
인천은 서구 열강과 청, 일 등 외세가 들어와 터를 잡았던 곳이다. 구한말에 청, 일, 영국, 러시아 등 각국 영사관이 있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모두 승리한 일본이 한동안 인천을 장악했지만 중국 화교의 뿌리는 깊었다. 지금 중국 음식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일본풍이라고는 건물 말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외세의 각축장이 됐던 불쌍한 조선이었지만 지금 한국은 주변 강국에 꿇리지 않는다. 인천국제공항은 동북아의 허브로 한국의 자랑이다. K-culture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한국어 학습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한국인의 창의성과 근면성 덕분이라 생각한다.
인천 구도심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왜 그곳이 구한말에 번성했나? 제물포에 닻을 내린 배에서 일본, 청, 영국, 미국, 독일인들이 내려 거주지를 마련하고 정착하면서 그리 된 거 아닌가. 항구가 있었기에 인천이 형성되고 발달했다. 그런데 지금 그 항구는 접근할 수가 없다. 도로로 가로막혀 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철망이 쳐져 있어 바다로 나가볼 수 없다. 항만 환경 자체가 100~140년 전과는 딴판이 됐으니 어쩔 수 없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바다를 접해 보려면 월미도로 가야 한다. 인천역 옆에 월미바다역이 있었고 거기서 딱정벌레 같은 자그마한 열차가 하늘 위 선로를 따라 월미도로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