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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May 07. 2024

안동을 찾아서 (3)

시내 탐방, 내가 태어났던 집이 그대로 있었다

도산면 가송리에서 512번 버스를 타고 안동 시내로 향했다. 한참 동안 승객은 나 혼자였는데 와룡쯤에서야 시골 아낙네가 탔다. 이제 시골에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다. 사는 사람도 자기 차로 다니지 대중교통을 안 탄다. 차 없는 노인들은 아예 잘 움직이질 않을 게다. 버스가 고개를 넘어 신안동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집들이 빼곡하다. 시내다. 미리 검색해 둔 찜질방인 '안동온천스파랜드'에 가고자 구 안동역 앞에서 내리려 했는데 그 전 정류장인 교보생명에 이르자 운전기사가 내리란다. 교보생명이 종점인 모양이다. 얼마 걷지 않아 안동온천스파랜드에 도착했는데 조짐이 좋지 않다. 건물 밖 꼭대기에 서 있는 '24시 찜질방'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아서다. 과연 안내대의 직원이 말하길 찜질방은 이제 영업을 않고 목욕은 9시까지만이라 했다. 찜질방은 없냐 물으니 '태평양사우나찜질방'이 있다고 해 어디냐고 하니 위치는 모른다고 했다. 그건 알아보면 된다. 저녁을 먹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부근 안동갈비골목 초입의 중국집에 들어가 짬뽕밥을 시키니 하루 종일 변변히 먹지 못했는데 배 불리 먹을 수 있었다. 식당에서 태평양사우나를 검색하니 태화오거리에 있었다. 어둠은 이미 깊었다. 저녁을 먹고 나와 다이소에 잠시 들렀다가 태화오거리로 가니 사우나에 가니 '연중무휴 24시'라 적혀 있었다.


사우나는 자그마했다. 그러나 손님은 제법 있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들어올 때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게 아닌가. 손님들은 늘 오던 이들이고 매일같이 그곳에서 어울리는 사이인 듯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긴 목욕료가 7천원에 찜질방은 9천원이니 저렴하다. 나중에 안동 사는 친구한테 들어보니 그곳은 노가다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했다. 탕 속에 몸을 담그고 전날 하루 종일 걸어 쌓인 피로를 풀었다. 자수정 한증도 했다. 비록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도산온천은 못 가서 아쉽지만 시내 사우나로 대신했다. 2층이 남탕이고 3층 찜질방으로 올라가 편히 하룻밤을 묵었다. 자는 손님이 제법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주섬주섬 챙겨 입고 찜질방을 나왔다. 6시쯤이었을 것이다. 이미 날은 환하다. 그러나 거리는 조용했다. 월요일이지만 공휴일이니 그럴 것이다. 태화오거리에서 걷기 시작했다. 이 조용한 시내를 걸으면서 옛날을 회상해보는 것이다. 발걸음을 평화동 철도관사로 향했다. 철도관사는 내가 유년시절 살았던 곳이다. 어렸을 때 있었던 철도병원 자리엔 다른 건물이 서 있었다. 삼층석탑을 지났는데 오래 전에 세워진 듯한 비석문은 옥동삼층석탑인데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평화동삼층석탑이다. 이곳이 원래는 옥동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옥동은 훨씬 서쪽에 있는데... 조금씩 옛날 살던 집으로 다가갔다. 워낙 예전과 모습이 달라졌기에 쉬 찾아지지 않았다. 어떤 근사한 주택을 보고 이 집인가 싶었다. 내가 살던 집을 헐어내고 이 집이 지어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조금 더 동네를 걷다가 진짜 내가 살았던 집이 눈앞에 나타났다. 5~6년 전쯤에 오랜만에 안동에 와서 어린 시절 살던 집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딴 집들은 죄다 헐고 새로 지었는데 어떻게 내가 살던 집만은 옛날 철도관사 그대로인가 싶어 놀랐던 것이다. 그런데 5~6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나. 그 사이에 헐고 누군가 새로 집을 지었으려니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집을 한 바퀴 빙 돌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거푸 찍었다. 마당에 채소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아마 집 주인은 딴 데서 살고 있고 이 집은 텃밭으로만 이용하고 집 내부는 쓰지 않는 듯했다. 집에서 살려면 엄청난 수리가 필요할 것이다. 서너 살 먹었을 때 세발자전거를 타던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 사진 찍은 곳이 지금도 그대로다. 철도관사는 언제 지어졌을까. 적어도 1950년대이거나 아니면 더 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제시대에 지어진 집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집이 지금도 평화동에 남아 있다. 제발 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과 달라진 점이라면 그땐 담이 없이 측백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곧 담 구실을 했다. 집 안을 들어가볼 수 없어 아쉬웠다. 어렸을 적 방은 다다미방이었다. 입구에 작은 부엌이 있었다. 마루 밑으로 어느 날 개가 새끼를 거의 열 마리 가량 낳아서 강아지들이 마루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충분히 눈에 옛집을 넣어둔 뒤 근처 서부초등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예전엔 개천을 건너야 학교였는데 그 사이에 복개가 돼서 개천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학교 건물도 2층 목조였는데 튼튼한 벽돌 건물로 우람하게 서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운동장이었다. 굉장히 운동장이 넓었는데 테니스장이다 뭐다 들어서서 운동장은 반도 안 되게 줄어들었다. 1학년 교실은 남쪽 대로와 나란히 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총알같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달려갔던 때가 어언 58년 전이다. 이제 초로가 되어 다시 와본다.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담임선생님은 살아 계실까. 


학교 앞 당북동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향했다. 길 왼편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남실네'라는 상호가 정겹다. 주인이 남실이라는 뜻이겠다. 남씨 집안에 시집 간 여성인 모양이다. 그 옆 아리엔미용실은 친구의 부인이 하는 집이다. 그 옆집이 기름 파는 집이고... 대안로로 접어들었다. 신시장 입구가 보이는 곳에서 왼쪽으로 꼬부라졌다. 대안극장 간판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과연 영화를 상영하고 있을까. 성소병원 앞에 곧 이르렀는데 규모가 우람했다. 서동문로로 들어섰다. 5학년 때 안동교대부국으로 전학 갔는데 한동안 평화동 철도관사에서 이 길을 따라 명륜동의 교대부국으로 다녔고 그러다 집이 명륜동으로 이사갔다. 얼마 걷지 않아 대창빌딩이 나타났다. 빌딩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2층 건물인데 어쩌면 60년 전 모습 그대로인가! 참 견고하게도 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도 오랜 세월 그대로란 말인가. 그리고 좀 더 가니 낯익은 건물들이 모습을 보였다. 안동교회다. 역사가 100년을 넘은 지 오래다. 그 옆에 현대식 건물로 안동교회100주년기념관이 우뚝 솟아 있다. 다시 그 옆은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이고 조금 더 가니 역시 고색창연한 건물이 그대로 서 있다. 목성동성당이다. 지도에는 천주교안동교구가톨릭센터라 돼 있다. 그리고 이 일대가 안동종교타운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기타 신흥 종교의 시설이 이곳에 모여 있다. 


목성교 사거리를 지나 서동문로를 계속 걸었다. 왼쪽으로 보건소 건물이 우람했고 북문동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렀다. 참 낯익은 거리다. 골목으로 꼬부라지니 문화광장이었다. '왔니껴?'라는 큰 간판이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경북 북부지방에서만 쓰는 '~껴'가 반갑게 관광객을 맞이한다. 아침이라 사람이 없지만 저녁에는 꽤나 흥청거릴 것이다. 안동도 많이 변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진출했는지 베트남 노래방이 있질 않나 웬 자그만 호텔들이 꽤나 많다. 아침 먹을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문을 연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신시장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시장인데 문 연 식당이 없을려구... 과연 신시장으로 넘어가니 어떤 식당에 문이 열려 있고 사람들이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국밥참맛있는집이라는 데였는데 들어서려니까 "10~15분 기다려야 하는데요" 하길래 그 정도 기다리는 것쯤이야 하고 들어갔다. 식당 내부가 참 정갈했다. 얼마 후 보골보골 끓는 순대국을 내왔다. 


이제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어딜 더 둘러보고 저녁쯤에 서울로 돌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차표를 알아보려 검색을 해보니 웬 일인가. 청량리 가는 기차는 하루 종일 매진이다. 이크! 안 되겠다 싶어 버스는 어떤가 싶어 검색을 해보니 버스도 9시 40분, 10시 30분에 각각 한두 좌석 있고 나머지는 밤 늦게까지 죄다 매진이었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이거 오늘 서울 못 올라가는 거 아닌가. 버스 표를 스마트폰에서 비회원으로 사려고 하는데 카드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카드를 안 가지고 왔는데... 실물카드 대신에 스마트폰에 카드를 심어서 결제에 쓰고 있어 카드 번호를 모른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모르겠다. 안 되겠다 싶어 부리나케 밥값 계산을 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안동터미널로 갔다. 다행히 9시 40분 차 표가 아직 하나 남아 있다고 해서 그걸 샀다. 출발이 한 시간도 안 남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곧 출발하는 버스 표를 사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게 됐다고 양해를 구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혹시 기차 표를 취소하는 사람이 있나 싶어 길 건너 기차역으로 가서 창구에 문의했더니 입석뿐이라고 해 포기했다. 버스터미널로 돌아와 9시 40분 차에 올랐다. 버스가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빠져나오더니 국도를 달리다가 감곡IC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갔다.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걸 알고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버스는 3시간여 걸려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2박 3일의 안동 여행이 그렇게 끝났다.


마치 꿈 같았다. 아무 준비 없이 나섰다가 안동 가는 표가 없어서 상주에 갔다가 상주에서 안동으로 간 거 하며, 산길을 두 시간 걸어서 가려고 나섰다가 사촌동생의 차와 조우해 그 차를 타고 산골 삼촌댁으로 간 것, 부모님 산소에 들른 뒤 밤에는 벌레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고 이튿날 모터보트가 달려와 나를 도산면 서부리로 데려다주었고 거기서 버스 타고 도산서원 지나 퇴계묘소 앞에 내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예던길(퇴계오솔길)을 걸은 일, 숲이 빼곡한 산속을 홀로 몇 시간 걸어 드디어 농암종택을 지나고 마침내 가송리 35번 국도까지 걸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안동 주변 곳곳을 운행하는, 하루 몇 번밖에 다니지 않는 시내버스가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것도 놀라웠고 부르면 모터보트가 달려와 무료로 태워주는 것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안동 시내로 들어와 찜질방에서 하루 잘 묵고 나와 아침에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찾아 내가 태어난 집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보고는 또 얼마나 놀랐는지! 도대체 시내에 이런 옛날 집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집 마당을 텃밭으로 쓰고 있다니! 비록 날씨가 받쳐주지 않았지만 2박 3일의 고향 방문은 충분히 흡족했다. 그 심심산골의 가래골(천전리)도 방문할 수 있었고 78세의 삼촌도 뵈었다. 무엇보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집을 다시 찾아 뜻깊은 시간여행을 했다. 갈증을 충분히 해소한 여행이었다.


'발통'이란 말을 또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평화동삼층석탑은 일명 옥동삼층석탑이다.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뒤쪽에서 본 모습이다.


내가 4학년까지 다녔던 안동서부초등학교의 지금 모습


운동장이 조금 보인다.


시내에 있는 성소병원


이 대창빌딩은 굉장히 유서 깊다.


안동교회는 고풍을 간직하고 있다.


목성동성당도 오래된 건물이다.


문화광장의 정겨운 사투리


커피 값이 싸기도 하다. 그리고 안동엔 아직 '다방'이 많다.


정갈한 식당


아침에 약 5km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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