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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May 06. 2024

안동을 찾아서 (2)

예던길은 퇴계오솔길이다

예안면 천전리 가래골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도산면 서부리로 나왔다. 이제 예던길로 간다. 대충 지리를 파악하고 나왔지만 정확한 거리와 예상 시간은 모른다. 자칫 하면 낭배를 볼 수도 있다. 걷는 데는 이골이 나 있고 자신이 있지만 만용을 부릴 순 없다. 새벽에 나왔더라면 서부리에서부터 걸어도 토계리 도산서원 지나서 가송리 농암종택까지 가겠지만 오전 시간을 어영부영 보냈으니 그건 무리다. 서부리서부터 걷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도산서원 부근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512번 버스가 30분 가량 후에 도착하는 걸로 돼 있어 믿어 보기로 했다. 과연 거의 정확하게 버스가 서부리에 도착했다. 버스엔 승객이 나뿐이었다. 도산면 소재지인 온혜리에 갔다가 도산서원까지 들렀다. 도산서원 입구 주차장에 닿았을 때 그 조용한 산골은 인산인해였다. 주차장은 차들로 꽉 찼다. 참으로 놀랍게도 내가 탄 버스가 도산서원 앞에 들렀을 때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타는 사람이 있을까봐 들렀을 뿐이었다. 모두가 승용차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도 사실 도산서원 앞 주차장에서 내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걷는 거리를 좀 더 줄이기로 하고 버스에 계속 앉아 있었다. 다음 정류장인 퇴계묘소에서 내리기로 하고 말이다. 버스는 퇴계종택 앞을 지났다. 그곳에 퇴계기념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퇴계묘소에서 내렸다. 11시 48분이었다. 이제부터 하루 종일 걸어야 한다.


경로를 기록하기 위해 스포츠트래커와 램블러 앱을 켰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에 비옷을 꺼내 입고서...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사람도 물론 보이지 않는다. 도산면 토계리에서 걷기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깊은 산중에 현대식 디자인의 멋진 건물이 나타났다. 이육사문학관이었다. 갈 길이 머니 들어가볼 순 없었다. 마을이 나타났다. 이곳은 도산면 원천리다. 원천리는 나의 넷째 고모님의 시댁 마을이다. 나도 십여 년 전에 고모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고모부도 살아 계셨는데 원천리 그 마을에 와보고 무릉도원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싶었다. 그만큼 절경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낙동강 건너에 병풍처럼 서 있어 이곳이 선경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탄했었다. 이번에 그 마을에 들어가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드디어 단천교 앞에 이르렀다. 걸은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이제 원천리도 지나고 단천리다. 단천교 앞 삼거리에 지도가 붙어 있었고 예던길 표지판이 서 있었다. 이제 드디어 예던길에 들어선다. '예던길'의 '예던'이 뭔가. '녀던'의 변음이 아닌가 한다. 옛말 '녀다'는 '가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예던길'은 '가던 길'이란 뜻 아니겠는가. 퇴계 선생은 산 너머 농암선생이 살던 곳으로 가기 위해 산길을 걸었다 하고 그 산길이 바로 지금 예던길이라 부르는 것으로 달리 퇴계오솔길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예던길은 예상과는 좀 달랐다. 산기슭에 난 둘레길 같은 걸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등산로였다. 해발 557미터의 건지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단천교에서 예던길을 처음 걷기 시작할 때는 옛길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산중턱에 몇 가구가 있었고 그들을 위해 도로가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포장도로가 끝나니 본격적으로 예던길이 시작됐다. 포장도로엔 웬 개구리가 그리 많은지! 왜 그들은 비를 맞으며 아스팔트 위에 나와 납작 엎드리고 있을까.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길은 좁아졌다. 인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마 수백, 수천 년 전에도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온통 주위 숲은 참나무류로 우거져 있었다. 가도 가도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비가 오니 누가 이 길을 걷겠는가. 비록 도산서원은 그렇게 북적대도 말이다. 도중에 놀라운 광경도 맞이했다. 노루인지 사슴인지 산양인지 잘 구별 안 되는 동물이 길에 나타났다. 날 잠시 노려보더니 부리나케 숲으로 사라져 버렸다. 카메라를 켤 틈도 없었다. 혹시 뱀을 만나면 어쩌나 하는 겁도 살짝 났지만 뱀을 만나진 않았다. 다행이었다.


건지산 정상은 비켜서 예던길은 나 있었고 어느 지점부터는 줄기차게 내리막이었다. 물론 인적은 없었다. 퇴계선생이 걸었을 땐 어땠을까. 별로 다르진 않았겠지만 야생동물은 좀 더 많았지 않았을까 싶다. 퇴계선생은 아마 도산서원에서부터 걸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걸은 거리보다 더 길었을 것이고 아마 하루 종일 걸었어야 할지 모른다. 내리막을 한참 걷다가 포장도로를 만났다. 그곳은 네거리였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내려오던 길에서 오른쪽으로 꼬부라졌다. 고개를 내려오다가 엄청난 절경을 맞이했다. 그 산중에 드넓은 밭이 있었고 건너편은 낙동강 건너 다른 산이었다. 한 폐가에서 비를 피해 잠시 쉬었다. 과연 농암종택 가는 길은 있을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가파른 경사면에 계단이 나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니 넓은 길이 나타났고... 저 멀리 숲속으로 아스라히 농암종택으로 보이는 기와집이 몇 채 보였다. 학소대를 지나니 곧 농암종택이었다.


농암종택의 주인인 농암 이현보는 조선 초기의 문인이요 학자다. 그는 1467년생으로 1501년생인 퇴계 이황보다 34년 연상이다. 그러나 생전에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퇴계가 농암을 찾아 예던길을 걸었을 테니까 말이다. 농암종택은 거대했다. 입구에는 농암선생고택이란 문패가 걸려 있었고 마당이 대단히 넓었다. 지금은 고택체험을 할 수 있게 된 듯 투숙객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너머에 분강서원과 애일당이 있었지만 비가 와서 가보진 않았다. 


안동댐이 지형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안동의 군자마을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위치에서 이동했는데 농암종택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원래 농암종택은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다고 한다. 분천리는 지금 도산서원 있는 곳과 가깝다. 그러나 지금 농암종택은 도산면 가송리에 있다. 도산서원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건지산을 넘어야 하니까 말이다. 농암과 퇴계가 살았을 당시에 농암종택과 도산서원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의문이 들지만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도산서원은 그대로라 하더라도 농암종택과 분강서원, 애일당은 애초 어디에 있었나. 


농암종택을 지나 버스를 타기 위해 35번 국도로 나오면서 강가에서 희한한 간판을 보고 경악했다. 아름다운 가송리 풍경을 이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 촬영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간판이었다. 절망했다. 세상 인심이 아무리 험악해지기로소니 어찌 이런 황당한 간판이 다 걸릴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외지인들은 마을을 지나지 말라고 하지... 대체 어떤 외지인이 이곳에 와서 무슨 사진을 찍었길래 이 동네 주민으로 하여금 이런 간판을 걸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씁쓸했다. 산천은 의구하지만 마음 씀씀이는 참으로 달라진 듯하다. 


농암 선생이나 퇴계 선생이나 효(孝)를 중히 여겨 이를 평생 끔찍하게 실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경로 사상은 참으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부모를 위하고자 해도 후손을 좀체 볼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시골에 아기 울음소리를 어디 듣기 쉬운가. 젊은이들은 다 도회지로 떠나고 없다. 어찌 이리도 변할 수가 있는지... 가송리에서 안동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니 역시 어김 없이 시간표대로 버스가 왔다. 와룡까지는 승객이 나 혼자였는데 안동 시내가 가까우니 한둘 타는 사람이 있었다. 시내로 들어오니 다시 문명세계였다. 어둠이 깊어진 뒤였다. 이날 하루 14.6km를 6시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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