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으로 바꾸기가 이다지도 힘든가
민법 물권 편의 소유권에 관한 조항에는 생소한 단어들이 적지 않게 들어 있다. 구거, 대안, 양안 등의 뜻이 쉽게 머리에 떠오르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이 들어 있는 민법 제229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이 제정되던 1958년 당시 민법은 한자로 씌었다. 지금도 실은 한자로 씌어 있지만 편의상 많은 법전이 한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구거는 溝渠, 대안은 對岸, 양안은 兩岸이다. 그래도 한자로 씌어 있을 때는 한자를 보고 웬만큼 뜻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한글로만 써 놓으니 무슨 뜻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도대체 '구거'라는 말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쓰는가.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에 반해 '도랑'이란 말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구거'는 '도랑'이란 뜻이다.
법에 '구거'란 말이 들어 있으니 관청에서는 '구거'라는 말을 쓰고 그 말을 접하는 국민은 '구거'가 낯설기만 하니 오래 전부터 '구거'를 쉽고 친숙한 말로 바꿔 써야 한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어 왔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1970년 2월 10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무려 54년 전인 1970년에도 '구거(溝渠)'는 어려운 한자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제시된 단어가 흥미롭다. '똘'이었다. '똘'이 무엇인가. '똘'은 '도랑'의 충청 방언이다. 과연 충청남도 공무원 교육원이 제안할 만한 단어였다. 그 후 '똘'이 얼마나 보급되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구거'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가 이미 1970년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뿐이 아니다. 1980년대에 여러 차례 '구거'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84년 3월 대법원등기제도개선위원회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용어를 쉽게 바꾸기로 하고 그중에 '구거'를 '도랑'으로 바꾸는 것을 포함시켰다.
이듬해인 1985년에는 법제처가 법령용어 순화편람을 발간했는데 거기에 '溝渠'를 '도랑'으로 바꾸는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기본적인 법률이라 할 수 있는 민법은 요지부동이었다. 민법 제229조, 제239조, 제244조에 들어 있는 '구거'는 지금도 여전히 '구거'이다.
그런데 민법이 이렇게 완강하게 '구거'를 고집하지 이미 다른 일부 법률은 '구거'를 버리고 '도랑'으로 쓰고 있다.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그것으로 이 법은 약칭 토지보상법이다. 이 법은 1962년 토지수용법이라는 이름으로 제정되었는데 당시 제47조는 다음과 같았다.
그런데 토지수용법은 2002년에 폐지되면서 이름이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로 바뀌었다. 단지 법률명만 바뀌지 않았다. 표기 문자가 한자에서 한글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溝渠가 도랑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지금도 민법에는 '구거'가 여전히 쓰이고 있는 반면에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토지보상법)에서는 '도랑'이 쓰이고 있다. '구거'와 '도랑'은 당연히 뜻이 같다. 똑같은 국법인데 왜 민법은 구거를 고수하고 토지보상법은 도랑을 쓰고 있나. 왜 이래야 하나. '구거' 하나 바꾸기가 이리도 힘들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