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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글밭

책을 정리하면서

내 물건은 내 통제 안에 있다

by 김세중

요즘 정리의 충동을 느낀다. 스마트폰의 어지러이 널려 있던 앱도 폴더로 묶어서 한 화면에 정리했다. 오늘은 베란다 벽장에 있는 책들을 정리했다. 물론 일부 책은 솎아냈다. 간직할 필요가 없는 책들 말이다. 한나절 걸려서 정리하고 보니 이제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거의 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뒤죽박죽 섞여 있으면 있어도 있는 게 아니잖는가. 정리를 마치고 나니 여간 개운하지 않다. 이제 내 물건은 내 통제 안에 있다. 어디 있는지 아니까.


책을 정리하면서 내가 지도를 참 많이 샀음을 새삼 절감했다. 이사를 몇 번 가면서 꽤 많이 버렸음에도 아직 남아 있는 지도가 상당했다.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으레 찾는 곳이 서점이었다. 서점에 가서 지도를 사야 직성이 풀렸다. 지도를 사서 지리를 파악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지도는 반드시 서점에서만 파는 것은 아니었다. 편의점에서도 지도를 파는 나라가 많았다. 그러나 역시 서점에 가야 다양한 지도를 만날 수 있었다. 때론 난감한 적도 있었다. 1996년에 베트남엘 갔는데 서점에 지도가 아예 없었다. 아마 지금은 아주 다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그랬다.


요즘은 외국에 나가더라도 지도를 사지 않는다. 스마트폰 안에 지도가 다 들어 있는데 지도를 살 이유가 없다. 지도가 폰 안에 들어올 줄 어찌 상상했겠나. 2008년 무렵에 스마트폰이 출현한 이후로 세상이 변했다. 아마 전세계적으로 지도책 만드는 회사들은 진로를 바꾸었을 것이다. 사업 축소, 인력 감원은 불보듯하다. 한국의 경우 종로 1가 북쪽 공평동에 중앙지도가 있었고 그곳은 지도 사러 오는 사람으로 늘 북적였고 직원이 참 많았다. 필자는 그곳에서 1/50,000 지도를 참 많이 사왔었다. 지금 그곳에 중앙지도는 없다. 딴 상점으로 바뀐 지 오래다. 컴퓨터를 켜거나 스마트론을 켜면 지도가 있는데 종이지도를 살 일이 뭐 있나. 물론 아직도 대형서점의 한 귀퉁이에 지도 코너가 있긴 하다. 종이지도에 익숙한 이들이 아직 있기 때문이다.


33년 전 일이 생각난다. 1992년 6월 중순 첫 해외 출장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샤를드골공항에서 택시를 탔는데 행선지를 말하자 택시 운전사가 지도를 집어들어 펴보지 않는가! 한국에서는 택시 운전사가 지도를 보고 운전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파리는 달랐다. 파리는 택시 운전사에게 지도가 필수품이었다. 한국의 택시 운전사들은 지리를 머리에 다 넣고 다니지만 파리의 택시 운전사는 지도의 의존해 운전을 했다. 지금은 아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종이 지도책 대신에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에 거리명을 입력하고 운전을 하지 않을까.


지난 세월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사온 지도를 버릴까 말까 생각하다가 버리기는 아까워 묶어서 광에 넣어 두었다. 특히 버리기 아까운 지도가 하나 있다. 도쿄 23구 지도인데 와세다대학 부근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오쿠타마까지 다녀오는데 지도에 최단 루트를 형광펜으로 표시하며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다. 벌써 20여 년 전인데 오쿠타마는 서울로 치면 연천쯤 되는 곳에 있는 깊은 산속이었다. 도중에 몇 번 길을 찾지 못해 애를 먹기는 했지만 지도에 힘입어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오토바이를 반납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의 지도가 아직 남아 있는데 앞으로 그런 나라에 다시 가게 될 경우 이 지도를 다시 들고 가게 될까. 안 그럴 것 같다. 스마트폰에 지도가 들어 있는데 괜히 짐만 되지 않겠는가.


버리고 치우는 거에 부쩍 재미를 붙이는 걸 보니 내가 나이를 꽤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예 외국에는 디지털 장의사라는 직업까지 생겼다 한다. 우리나라에도 있는지 모른다. 디지털 장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꼭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 두는 것은 나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싶다. 하루를 아주 유익하게 보냈다. 얼마나 시원하고 홀가분한지 모르겠다.


많이 추려냈는데도 꽤 남아 있다
묶어서 장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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