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을 들어 벽을 스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서늘한 기운이 손끝에서부터 밀려왔다. 영하 25도, 체감온도는 영하 37도까지 떨어지던 밤, 욕조와 부엌 싱크대의 수도를 얼지 않게 살짝 열어두었다. 현관문 도어락은 잘 잠기지 않아 삐삑거렸다. 그나마 고비가 되는 이틀이 주말인 건 다행이었다. 뾱뾱이를 붙여둔 창문 아래로는 찬 바람이 들어와서, 수건을 길게 접어 막았다. 집에 있는 보조 배터리는 모두 100% 충전해 두었다. 하이드로 퀘벡(퀘벡 전기공사)에선 전기공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절전해 달라는 이메일이 왔다. 2026년 1월 24일, 이렇게 긴장되는 밤은, 2023년 얼음비로 일주일 가까이 정전을 겪었던 이후 처음이었다.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면, 밖에 나가기가 무섭게 콧속이 얼어붙어서 숨 쉬는 느낌이 서걱거린다. 차도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남다르다. "어혀혀허" 하며 힘들게 몸을 일으키는 할아버지처럼, 좀 낡은 차라면 운행을 못하기도 한다고 했다. 앞유리에는 서리가 껴서 한참 긁어내야 출근할 수 있다. 텍사스에도 눈이 왔다니까 늘상 겨울이 추운 캐나다인으로서는 엄살 부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이번엔 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
이번 겨울 추위가 최악인 이유
몬트리올은 춥다. 그런데 시리게 추운 날에는 햇빛이 짱짱했다. 대체로 그랬다. 이번에는 그토록 추우면서도 눈이 날렸다. 부슬부슬 부서지는 건조한 눈이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날렸다. 뿐인가, 보통의 겨울이라면 삼한사온까지는 아니어도 며칠 추우면 또 며칠은 푸근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영하 10도에서 20도 사이의 날씨가 두 주 이상 계속됐다. 그러면서도 보통 '얼음비(freezing rain)'로 인해 생기는 대규모 정전사태도 같이 왔다. 이번에는 노후화된 전기시설물이 원인이었다는데, 주로 전기로 난방과 취사를 해결하는 대부분의 몬트리올 주민들에게 정전은 치명적이다. 실제로 이번 한파에 옆동네 할머니가 두 분이나 돌아가셨다. 나무를 부러뜨려 전선을 덮치는 얼음비와는 달리, 이번 사태의 원인은 지역 변전소의 오래된 장비에 걸린 과부하였다. 고쳐놓으면 갑자기 모든 가정의 난방이 최대치로 작동하면서 셧다운 되기를 반복해서 복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춥고 눈 오고, 정전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한 길이 여기저기 파이면서 도로가 아주 엉망이 되는 최악의 겨울
나는 몬트리올에서 비교적 오래된 지역에 살고 있다. 웬만한 2-3층 높이의 집보다도 큰 가로수들이 강풍이 불거나 얼음비를 맞으면 부러져서 전신주에 걸린 전선을 덮친다. 아직도 '전봇대'가 줄줄이 늘어서있는 이 전근대적인 풍경은 몬트리올의 기후와 환경을 이해해야 받아들일 수 있다.
몬트리올의 땅은 단단하다. 암반을 깨고 땅을 파는 것도 큰일이지만, 인건비 비싼 나라에서 큰돈을 들여 전선을 매립했다 한들 문제가 생겼을 때 언 땅을 파서 공사하는 것 또한 엄청난 작업이다. 게다가 눈이 오면 염화칼륨을 뿌려 제설작업을 하는데, 이게 땅밑으로 스며들면 전선을 망가뜨리는 위험요소가 된다고 한다. 더구나 수십 년 전에 묻어놓은 상하수도, 가스 파이프를 건드리지 않고 작업을 하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그리핀타운처럼 몬트리올의 신도시 구역이라면 몰라도 오래된 지역은 전선을 파묻는 대신 공중에 달린 전선을 강화하는 작업을 한다.
지난가을, 집 옆에 작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면서 주말 오후 온종일 전기를 끊고 전기작업을 했더랬다. 아파트 전기 연결 공사를 하는 김에 변압기 교체작업을 했다고 했는데, 그 덕분에 이 근처만 정전 사태에서 멀쩡히 지나갈 수 있었다. 은근 거슬렸었는데 뜻밖의 덕을 봤다.
전기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한국이 전 세계 물량의 90% 이상, 압도적으로 높은 공급을 하는 제품 중 하나가 바로 부탄가스라고 한다. '브루스타' 하나면 적어도 얼어 죽을 염려 없고, 한국인이라면 집에 쌀과 라면은 비축해 놓을 테니 굶어 죽을 일은 없다.
하지만 전기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꽤 많은 불편을 야기한다. 가게에 가도 물건을 살 수가 없다. 바코드를 못 찍어서 계산을 못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03년 북미 최악의 정전사태 때는 신호등이 안 들어오자 교통이 마비됐다. 요즘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사업장엔 비상발전기를 쓰기도 하지만 1998년 퀘벡 최악의 얼음비 사건 때는 상점이나 레스토랑을 하는 한인교포들이 냉장고가 서버리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나 정전사태가 잦은 몬트리올이 2018년부터는 친환경 기기를 제외한 벽난로의 사용을 금지했다. 정전이 3시간 이상 계속되면 쓸 수 있도록 허용한다지만, 청소가 안 된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간 온 집안이 너구리굴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언제 정전이 될지 모르는데 비싼 돈을 들여 매년 업체를 부를 수도 없다.
이제 좀 날씨가 풀려 안도하고 있는데 하이드로 퀘벡에서 경고 메일이 날아왔다. 우리 집은 일 년 평균 사용 전기료를 12개월에 균일하게 나눠 내는데, 요즘 많이 쓴다고 납입 금액을 18%씩 더 내란다. 18프로? 난방을 얼마나 올렸길래? 온도계를 보니... 이런,18...도.
봄이 오려면 아직 두 달 남았는데 극소용돌이(Polar Vortex)가 이달 말에 또 내려온단다. 버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