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언제, 누구와 함께 있을 때의 나를 가장 좋아하시나요?
예전엔 그런 바람이 있었다. 누구를 만나든, 어디에 있든 늘 같은 사람이고 싶었다. 감정이 쉽게 요동치지 않고, 누군가의 말에 따라 나의 결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 어쩌면 그게 ‘멋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나라는 사람의 결도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지금은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어디에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조금씩 그 모습이 다른 것 같다. 연구실에서의 나는 조용하고 성실하게 내 할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문제를 곱씹고 회로를 설계하고, 혼자 고요하게 몰입하는 데 익숙하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조금 더 유쾌하고 가볍다. 실없는 농담도 잘하고,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기도 한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생각이 많아지고, 지난날을 되짚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한다. 그렇게 나는 상황에 따라,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모습은, 연인인 h와 함께 있을 때의 나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어릴 적의 내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자주 웃고, 장난도 치며 날을 세우지 않는 상태. h와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부드러워지고, 자주 웃게 된다. 농담을 던지며 웃기려 하고, 어느새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억지로 말을 채우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는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의 내가 좋다. 그건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잊고 지낸 편안함일지도 모르겠다. h와 함께하면서, 그걸 다시 꺼내 볼 수 있게 되었다.
돌아보면 그건 참 고마운 일이다. 너라는 사람이 내 안의 본연의 나를 조용히 끌어올린다는 것. 애써 보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가는 상태. 함께 걷다 보면 보폭이 다를 때도 있지만, h와 함께 걸을 때면 자연스레 보폭을 맞추고 싶어진다. 내가 조금 빠르면 속도를 늦추고, 그녀가 앞서가면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억지로 맞추려는 게 아니라, 맞추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 그 마음 자체가 나를 바꾼다.
어릴 적에는 누군가가 내게 원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걸 어떻게든 맞추려 했다. 그러다 잘 되지 않으면 자책했고, 억지로 내 일부를 바꿔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이질감을 남겼다. 그때는 그런 노력이 연애의 일부라고 믿었다. 결국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야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h를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꼭 그렇게 힘들게 맞춰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시작부터 조금 더 잘 맞는 옷을 고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란 걸.
물론 h와 나도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식성도, 듣는 음악도, 좋아하는 분위기도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편안한 이유는, 우리의 본연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고, 그 기대를 채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닿는 지점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녀 곁에서 내가 꾸며낸 모습이 아닌,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생각해 보면 이전의 연애에서 가장 큰 갈등은, 내 말투와 카톡 말투와 같은 아주 사소하지만 본질적인 부분에서 비롯되곤 했다.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평을 들었고, 바꿔보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끝나버린 하나의 서사는 오래도록 나를 갉아먹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h와 함께 있을 때 저항 없이 부드러운 사람이 된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런 모습의 '나'가 되어있었다. 사람이 바뀌지 않아도, 상대가 달라지면 나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게 사랑의 신비한 점이 아닐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기보다는, 서로의 결이 자연스레 맞물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그래서 지금의 연애는 편안하고, 그 편안함 속에서 나라는 사람도 더 좋은 방향으로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안에서 나도 조금씩 다르게 반응한다. 그 많은 나들 중에, 그녀와 함께 있는 내가 제일 좋다. 그래서 나는 h를 좋아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마음은 'h를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함께할 때 나도 조금 더 괜찮은 내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 앞에서는 부드러워지고 싶고, 잘 보이고 싶고, 함께 웃는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진다. 나란히 걷는다는 건 단지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 일이 아니다. 서로의 호흡을 기억해 주고,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옆에 머무는 일이다. 당신과 오래도록 같이 걸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