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알못이 어쩌다 게임기획자가 되었을까?
그저 낯선 물체
일반 가정집에서 보편적으로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지 않던 때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내게 컴퓨터란 낯설고 해괴한 기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갈 때쯤, 아빠가 일 때문에 장만한 컴퓨터도 건드려선 안 되는 고귀한 영역으로 분류되었는데 그나마 주어진 사용시간도 삼 남매인 우리가 원만하게 이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난 이 낯선 물체를 그저 학교 시험용, 자격증 따는 아이 정도로 생각하고 멀리해 버렸다.
자연스레 컴맹 딱지가 붙으면서 스마트한 기기는 제대로 만지지도 않고 무서워하곤 했는데, 내 소유의 핸드폰이 생겼을 때도 그냥 단순한 전화기일 뿐이었다. 그렇게 기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려 했다.
과제를 해야 하는 대학생이 되면서는 내 소유의 노트북이 생겼고 급격히 친해지려 했지만 과제라는 장벽 앞에서 우리는 또 한 번 멀어져 갔다.
그러던 당시 친한 친구 중 R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스마트폰이 보급되던 이전부터 어떻게든 느려터진 인터넷을 연결해(학교의 인터넷이 매우 느렸다) 수업 중 몰래 아이팟으로 게임을 열정적으로 하곤했다.
그 때 처음으로 '저렇게 열정적으로 할 만큼 재밌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도 폰 게임으로 미니게임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지만, 모범생인 친구들과 친하기만 했던(난 모범
생이 아님)나와는 다른 세상이야기였다. 아마 내 무의식 저 편엔 기기에 대한 무서움도 있었겠거니 싶다.
더 멀리 멀리
어쨌든 R이란 친구와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녀의 광적인 게임을 옆에서 지켜보던 내게도 할 기회가 몇 번주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엄청난 속도로 죽는 게 창피하고 짜증 나기도 해서 괜히 게임은 재미없다고 중얼거렸다. 그때부터였을까? 게임과 내 무의식 중에 생겨난 거리감이..
그렇게 영원히 게임과는 거리가 없는 사람으로 살 것이라 생각하며 20대를 보냈다. 더욱이 문화 기획자라는 일을 하면서 주로 행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다 보니 밖으로 돌아다니기 바쁜 인생이 되었다.
실제로 룸메이트는 2주에 한 번밖에 나를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집에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허나 무한대일 줄 알았던 내 에너지도 쉴 새 없이 뿜어내다보니 소리소문없이 바닥나버렸다.
네트워킹이나 행사 등등을 모두 내팽겨치고 간절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 것이다. 일주일에 3,4번은 일을 포함해서 사람들과 모임을 했었는데 말하는 걸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아마 그때가 처음이지 않을까?
그래서 난 빛쟁이들을 피해다니 듯이 사무실에 조용히 숨어있는 날이 많아졌다.
지쳐 숨어있던 내 옆엔 틈만 나면 새로운 아이템을 생각하고 그걸 늘어놓는 한량 같던 직장 선배가 있었는데, 그는 쉴새없이 엉뚱한 생각을 쓱싹 그려 내게 보여주곤 했다.
옆자리 이상한 사람
선배는 내 삶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인간 유형이었는데 실행력이 빠르다 못해 미친 인간이었다.
한날은 해외여행을 다녀온 선배는 어느 날 자신이 다녀온 도시의 향을 담은 캔들을 만들고 싶다며 대충 디자인한 시안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다. 원래 남의 장단에 북 치고 장구 치는 걸 좋아하기에 신나게 둘이서 네이밍도 하고 추가 아이디어에 대해 하루종일 떠들어댔다.
그러고 다음 날 아침, 잠깐의 일탈로 끝날 줄 알았던 선배의 상상은 실행되고 있었는데 무려 어제 저녁 방산 시장을 다녀왔다는 것이 아닌가?!
향에 대한 전혀 아는 것도 없는 그였지만 순식간에 조향에 대한 책 그리고 재료들을 몽땅 사서 보여주는 선배를 보자 좀 멍했다. 매우 수동적인 나란 사람은 상상한 걸 행동으로 옮기려면 족히 6개월 이상은 걸리는데..
어째서 이 인간은 하루면 되는 건가... (미친 실행력의 주인공은 훗날 동업자이자 대표가 되는 인물이다)
옆자리에 앉아 늘 한량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외쳐되던 그는 홀로서기를 해야겠다 말하며 회사도 아주 빠른 속도로 나가버렸다. 몇 년간 사무실에서 함께 일탈을 즐기던 동료가 나가자 놀랍게도 내 남은 의지도 바사삭하고 타버렸다.
곧이어 나 또한 [뭐든 재밌는 걸 해보자]라는 단순무식한 발상으로 덜컥 퇴사 결정을 한 건 그 사람의 영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무작정 백수가 된 난 뭔가에 이끌리듯 그 선배를 찾아가게 되었다.
뭘 함께 해보자는 심산은 아니었고, 단지 그의 다음 상상이 궁금하고 궁금해서 찾아간 것이다.
너 혹시 게임 좋아하냐?
우린 종종 다양한 아이템과 생각에 대한 토론을 했던 탓에 새로운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따끈따끈한 3일 차 백수인 나와 달리 3개월 차 백수인 그는 사이드 프로젝트로 마을 지원사업을 받았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미 사람들을 모집해 2차례나 동작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즐길 수 있는 간단한 퀘스트를 하는 게임 행사를 했다는 것. 그리고 나름 사람들 반응도 좋았다는 것이다.
평소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주특기이자, 프로 뚜벅이인 난 순간 눈이 반짝거렸다.
"오호 그거 재밌는 아이템인데요? 엇 그거 잘될 거 같아요!!"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그의 질문은 바로 '너 혹시 게임 좋아하냐?'였다.
너 게임 좋아하냐?
게임..?! 컴맹이자 게임에 대한 이력이 전혀 없지만 '퍼즐 게임만 할 줄 알아요.'가 어째서인지 입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나의 뇌 데이터에 입력된 퍼즐게임이란 그저 색 맞추기, 같은 과일 맞춰서 터트리기 등의 단순하게 머리를 많이 쓰지 않는 그런류의 게임이 다인데 말이다.
실은 그 마저도 금방 질려서 오래 못하지만, 왠지 게임을 할 줄 안다고 하면 좋은 제안을 할 것 같아서였을까?
마침 그는 현재 자신의 사이드 프로젝트의 진도가 더딘 것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혼자서 계속해서 이끌어나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어..!! 그럼 저랑 같이 더 키워봐요. 대박나게 할 수 있어요! "
참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컴퓨터를 무서워하고 게임을 전혀 모르면서 성공까지 자부하며 붙잡았다.
이 일을 계기로 불도저 선배와 대책없는 기름칠 전문인 내가 만나 얼떨결에 게임회사 창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하던 일이 제안서를 쓰고 지원사업을 받아 실행하는 일이었기에, 우린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각종 창업 지원 정보를 찾는 것 먼저하였다. 구체적인 비지니스 모델이 있는 건 아니었어도 이미 데모 버전을 실행해본 그는 빠르게 초기 자금을 만들어내기위해 닥치는 대로 각종 창업지원사업에 지원했더랬다.
다행히도 당시 도시재생이 막 떠오르던 시기였기에 지역의 자원을 활용한 게임을 만든다는 우리의 생각은 나름 여기저기서 통했고, 무난하게 지원사업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개발자였던 그의 개인적인 역량과 사전에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유리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처음만 순탄했던 게임 기획자로서 첫 도전이 얼렁뚱땅 시작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