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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기록자 Dec 19. 2023

01. 도쿄에서 10시간 게임하기?

겜알못이 어쩌다 게임기획자가 되었을까?

생소한 게임 모델을 찾아서 

2018년 겨울, 지역을 활용한 게임을 만들기로 한 우리는 창업지원금을 받기 위해 빠른 데모 모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마침 백수가 된 야매 디자이너 친구를 꼬셔 3명이 최종적으로 한 배를 타게 된 것이다. 

게임을 모르는 기획자(나), 게임개발 전공이 아닌 개발자(대표), 디자인을 배운 적 없는 디자이너!
비전공자 모임인 우리에겐 지금도 생소한 야외방탈출 모델의(2018년도에는 더욱 흔치 않은 소재) 레퍼런스를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과연 사람들이 게임을 하면서 지역 관광을 하는 것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지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해외의 사례들을 찾아 먼저 경험해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행히도 그나마 가까운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하는 "도쿄 메트로 더 언더그라운드 미스터리"를 발견했다.

도쿄 메트로와 함께하는 게임이었기에 정해진 기간 내에 제한 없이 지하철을 이용하며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엄청난 메리트가 있었다. 대략 10시간의 소요시간이 걸린다는 무시무시한 후기들은 뒤로한 채 곧장 일본행 티켓을 끊었다.     

https://realdgame.jp/chikanazo/5/index.html

게임 티켓 겸 지하철 승차권 

눈떠보니 일본 도쿄

나름 일본어회화를 잘하는 디자이너 친구와 나, 둘이서 출장을 빙자한 도쿄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의 야심 찬 검은 속샘은 2박 3일 일정 중 야외미스터리 게임은 반나절만에 클리어하고 남은 시간은 신나게 도쿄를 구경하고 돌아오기였다. 야간 비행으로 도착한 숙소에서도 "10시간? 우리는 5시간 만에 끝낸다!"를 당차게 외치며 앞으로 닥쳐올 혹독한 고난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불편하고 추웠던 숙소에서 잠을 설친 탓에(가장 싼 에어비엔비로 구한 방은 역시나 꽝)
최악의 컨디션으로 게임패키지(지하철 이용권 겸용 티켓,미션지, 볼펜)를 구매할 수 있는 수령처로 향했다.
오전 9시면  나름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 일본인이었지만 은근한 소속감과 경쟁심마저 생겼다.     
그러나 빽빽한 영어 미션지를 펼쳐드는 순간 경쟁심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일본어, 영어 택 1 ) 

게임 미션지 & 현장 d

도쿄의 지하철에서 최악의 팀워크를  

평생 영어를 배웠건만, 해석과 함께 머리까지 써야 하는 상황에서 영어는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게다가 첫 미션의 해답을 찾아야만 게임 시작 장소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시작부터 막히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즉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찍어서 맞출 수가 없다..)       

게임의 재미를 위해 친절하게도 그 어느 곳에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제작사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나마 약간의 허용을 베풀어 힌트를 모바일로 제공해 주는데 아마 그것조차 없었다면 도망쳤을 수도 있다.  


친구와 난 전혀 다른 타입 인간인데 우리의 유일한 공통점은 둘 다 급한 성격과 다혈질이란 사실이다.  
좋지 못한 컨디션 때문인지 서로를 향한 거친 한국말은 조용한 도쿄 역사 내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쩌렁쩌렁한 그 소리는 마치 재앙과 같은 불길함을 예고하는 듯했다.   

손발이 지지리 맞지 않는 것도 모자라 성격마저 괴팍한 우리에게 야심찬 도쿄 여행 꿍꿍이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하.. 10시간은 무슨, 20시간 걸리겠다.] 


따뜻한 커피와 빵이 가져다준 평화 

1차적으로 허접한 수준의 영어 번역을 거치면 굳어진 머리를 총동원해 미션지 속 알쏭달쏭한 미션들을 풀며 정신없이 여러 지하철 역을 내렸다가 타기를 반복해야 한다. 

이 행위를 무한으로 반복하다 보면 나중엔 이곳이 일본인지 한국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그래도 종종 위안이 되는 건 같은 미션지를 든 동료(?)들을 마주칠 때였다. 이는 서로 격려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가 아닌 그저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정답을 유추해 볼 수 있을까라는 헛된 희망 때문이었다.


매우 당연하게 서로가 푸는 지점이 다르기에 매우 바보 같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춥고 배고프고 막혀버린 미 미션 앞에서 실낱같은 희망이었기에, 그들을 따라 역에서 내려 낭패를 보는 일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설상가상으로 네 탓 내 탓하느라 게임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갔는데, 이미 한껏 지쳐버린 우린 잘못 내린 어느 역사 내를 터덜터덜 걷다 본 스타벅스에서 잠깐의 휴전을 가지기로 했다.
[주문한 따뜻한 라떼와 빵이 나왔습니다]   

드디어 몸속에 에너지를 보충할 따뜻한 음식물이 들어오자 고장 났던 뇌는 삐뚤고 모진 말만 내뱉는 대신 웃음신호를 보내왔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움직이면 이성이 마비가 된다.     

미션 장소 중 하나, 게임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도대체 왜 이걸 10시간째 하고 있는 거야?!

거북이 같은 속도로 겨우 껴맞춘 정답 찾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거리엔 조명들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추위에 새빨개진 손처럼 거리는 알록달록 매우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당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10시간쯤 지났을까? 앤딩을 볼 기미가 보이자 그제야 왜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긴긴 시간 동안 폰과 미션지를 붙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것일까라는 정상적인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전에 그저 빨리 탈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게임이 끝날 때쯤 되자 이성이 돌아왔고, 할 때는 해치우기 바빴던 얇은 미션지 속에 놀랍도록 섬세하고 치밀한 퍼즐, 트릭들이 있었다는 것에 새삼 감탄했다.  

사실 우리에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제한된 시간이 존재했으므로 충분히 즐길 여유가 없었지만 만약 넉넉히 기한을 두고 플레이했다면 좀 더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가령 미션지를 뒤집거나 접으면 원래의 문장이 완전히 다른 뜻을 가진 문장이 된다. 또한 패키지 속 볼펜, 파일마저도 하나의 단서가 되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숨겨둘 생각을 했을까 라는 경이로움까지 생기게 한다. 

물론 실내에서 진행하는 방탈출도 곳곳에 숨겨진 단서를 조합해 장치를 푸는 경험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실외에서 하는 미스터리 게임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실히 다른 매력을 준다.  
무엇보다 내 발로 다음 장소를 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마법의 문을 열고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건 분명하다.  

실제로 어느 작은 동네의 공원에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공원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기도 했다. 

만약 내가 도쿄를 여행으로 방문했다면 이 작고 조용한 동네에 내 발로 찾아 올 일이 있었을까?    

한국에 가면 

그저 게임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어쩌다 출장의 본 취지에 맞춰 충실하게 12시간가량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추위와 배고픔을 달랜 밤 12시가 되어서야 아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짜증 나지만 묘하게 매력인데 여윤까지 남는 게임을 우리가 한국에서 직접 만들 수 있을까?' 

맥주를 털어 넣으며 디자니어 친구가 웃으며 물었다.

[한국에 가면 만들 수 있겠지. 아니 만들어야지] 난 속으로 대답을 하며 안주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게임의 장점, 미션수행 방식, 참여 현황, 참여 피드백을 기록하며 잠들었다. (훗날 자사 게임을 만드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된다)  

 

출장을 다녀온 지가 5년 정도가 훌쩍 지났지만 낯선 곳에서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경험을 탓인지 매년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그날의 분위기와 공기 등이 떠오르곤 한다. 

당시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겨우 클리어한 게임이었지만 초짜 게임 기획자에겐 아주 훌륭한 참고서가 되어주었기에 아직도 소중히 패키지를 간직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실제로 우리 회사의 자체 제작 게임의 방향성을 잡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단순 퀴즈식이 었던 주관식 퀘스트가 복잡하고 미스터리 한 퍼즐 형태로 탈바꿈되었고 트릭도 다양하게 제작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12시간의 치열했던 경험의 대가는 이미 충분히 치르고 남았다. 

아쉽게도 현재는 <도쿄 메트로 더 언더그라운드 미스터리> 서비스가 종료되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제 한번 또 도쿄미션 티켓을 끊으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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