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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기록자 Dec 20. 2023

02. 두근두근, 첫 테스트(1)

겜알못이 어쩌다가 게임기획자가 되었을까?

팀 내에 전문가가 있나요? 

내가 경험한 창업 프로그램은 대부분 멘토 코칭과 지원금을 지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참여팀은 코치님의 코칭과 함께 일정 기간 내 프로젝트 지원금을 받아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식이다.      
우리 역시 정기적인 코칭 시간을 가지곤 했는데 코치님의 첫 질문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장소를 게임화할 건데, 팀 내에서 전문가 혹은 전공자가 있나요?]
차분하면서 담담한 그의 말투와 달리 질문은 날카롭게 꽂혔다. 게임 창업을 한다고 했으니 코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는 당연한 질문이지만 소심한 마음속엔 비전문가 모임인 우리가 마치 모난 돌 조합같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런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할 수 있는 답변은 그저 '전문가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죠."였다.  

노력. 그렇다. 그 당시 나와 팀원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의 노력하는 것 밖엔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일까?  

우리의 첫 목표는 도쿄에서 즐겼던 미션게임처럼 한국 시장에서도 판매가 가능할까를 검증해 내는 것이었다.

과연 충분히 즐길거리가 차고 넘치는 야외에서 '머리를 쓰는 게임'을 위해 폰과 미션지를 들고 다니는 수고스러운 행위에 돈을 지불한다는 사람이 있을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처음엔 팀원들끼리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나와 디자이너 친구는 [역사, 브레인, 교육 등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고객은 학부모)]이 우리 고객군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에 반해 대표는 [새로운 데이트나 놀거리를 찾는 20~30대 커플 혹은 친구]가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두 타겟 별로 다르게 게임을 만들어서 테스트해 보면 되죠!"  

좀처럼 좁혀지지 않던 우리의 생각을 코치님은 아주 명쾌하고 간단하게 정리해 주셨다.

게임을 만들 시간이 한 달 뿐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완전히 다른 타깃(고객) 특성을 고려하여 각각 다른 타입의 게임을 만들어 테스트하는 첫 미션이 결정되었다.(장소, 스토리, 난이도 구성 등)

어쩌다 보니 게임 기획자로서 첫 시험무대가 아주 숨 가쁘고 빠르게 뚝딱 마련된 것이다.    

먼저 고학년의 초등학생 타깃을 1그룹으로  20~30대 커플 혹은 친구 집단을 2그룹으로 설정해 각각의 게임 방식을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2그룹에 비해 폰을 가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작을 것으로 예상되는 1그룹은 미션지와 연필로만 플레이하는 방식으로 정했다.

반면 핸드폰이 익숙한 2그룹은 모바일을 기본으로 활용하되 미션지와 함께 즐길 수 있는 형태로 결정했다.



던저진 주사위 

회의결과 게임 장소는 1그룹(20~30대) 경복궁, 2그룹(초등학생 고학년) 지역도서관으로 정해졌다.

1그룹은 무난하게 지인을 총 동원해 테스터들을 대략 20명 가까이를 모집했는데 2그룹 모집은 고민이 되었다.(주어진 시간은 매우 짧았기 때문에 대외적인 홍보를 하기에도 어려웠던 상황)

다행히도 폭넓었던 대표의 인맥 덕분에 작은 지역 도서관의 관장님의 도움을 받아 그곳의 이용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남은 건 선보일 게임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게임의 배경이자 핵심 자원이 되는 실제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부터 기획은 시작되는데, 이는 야외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게임의 특수성 때문에 만들어지는 내내 수차례 그 장소를 방문해야 한다.  

원래도 프로 뚜벅이이자 돌아다닌 것을 매우 좋아하는 내게는 아주 쉬운 일이라고 자만했다. 허나 때는 미친 듯이 칼바람이 불어오는 1월이었다. 1월의 경복궁은 심각하게 춥고 추웠다.

아름다운 자연을 어느 방향에서나 볼 수 있는 고궁이지만 그 말은 어떠한 위치에서도 바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온몸을 꽁꽁 두른 채로 완전 무장했지만 고궁의 위엄 앞에서는 철저히 무너졌다.

몇 날 며칠을 미로 같은 경복궁 안에서 지내며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었는데, 친절한 해설사 선생님이다.

칼바람이 불던 추운 날 연습장을 들고 돌담 앞에 쭈그려 앉은 내가 안쓰러웠던 탓에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처음에 그는 내가 미대생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없는 나의 끄적임을 보고 고고학자를 꿈꾸는 학생으로 오해하시고 아주 친절히 경복궁의 숨은 비밀들을 1대 1로 들려주셨다.  

선생님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지식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전문적인 정보와 사실 검증은 필수적인 것이기에 관련 서적들을 사모았다. 난 분명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어째서 역사학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어쨌든 지도를 보지 않고 내가 만든 동선대로 스스로 이동할 수 있을 때즘되자 따뜻한 사무실에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재밌어 보이는데, 이 새벽에 뭐하세요?  

2그룹(초등학생)을 위한 게임은 규모가 작은 도서관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방탈출 카페처럼 장치들을 미리 세팅해 둘 수 있어 한결 수월했다. 기존의 도서관 내 책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아이들이 직접 찾을 수 있는 장치들을 가볍게 설치하면 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거나 자료를 뒤지는 시간은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경복궁 내에서 진행하는 게임을 먼저 제작하고 데모  테스트 날짜를 잡았다.  

실제 나에게 주어진 기획시간은 한 게임당 2주 정도가 주어졌는데(디자인과 개발은 1주로 더 짧음) 거짓말하지 않고 일주일에 1번 정도만 집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빠듯했다.


지원사업에서 제공한 코워킹사무실이었기에, 사무실의 밤을 지키는 몇몇의 특정한 동기팀들은 예외 없이 그날 밤도 지키고 있었다. 아직 아이패드를 갖고 있지 않던 시절이라 손으로 이면지에 게임 속 요소들을 슥슥 그려대고 있는 내 앞으로 누군가가 불쑥 비타오백을 건넸다. "이 새벽에 재밌는 거 하시네요?"  

그도 그럴 것이 손으로 하나하나 비석들을 따라 그리고 있으니 재밌어보였을 것이다. 언제 살면서 이 많은 조형물을 구석구석 세어보고 그려보고 비틀어보겠는가? 다만 남들이 다 잠든 새벽에 이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타인이 볼 때는 경복궁을 뜯어보는 내가 즐거워 보인다니 다행이다.


가상의 스토리를 만든 뒤 현실 세계에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인데, 마치 서로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붙이는 것 같다. 장소를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마냥 허상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만은 없기에 최대한 자연스럽고 몰입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거기다가 수수께끼 같은 경복궁의 수많은 조형물, 건축물들의 배경지식을 담기에 귀찮다고 덜어낼 수도 없다.
적어도 게임을 통해 접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용도였는지 정도는 알고 가게 하는 것이 우리 게임의 목적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담아야 하는 보석 주머니는 조그마한데, 넣어야 할 보석은 차고 넘치는 상황이 된 것처럼 과한 것들은 덜어내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작은 모바일 기기 안에 재미도, 몰입감도 줘야 하고, 역사적 사실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나의 첫 시험대는 스멀스멀 다가왔다.   

경복궁에 숨은 스토커

한 달 뒤, 고대하던 첫 테스트 날짜가 다가왔다.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내 방대한 욕심을 현실 가능성 있게 줄이고 줄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도의 2시간짜리 테스트용 게임이 드디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되자 경복궁 입구에선 미션지와 미션 접속 링크(웹으로 제작), 입장권을 받아 든 15명가량의 2그룹(20~30대)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 날은 우리의 첫 게임의 탄생을 축하라도 하듯 한파가 마중을 나와, 가진 옷 중 가장 두꺼운 패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디찬 바람이 살을 파고들어 가만히 서있기 힘든 정도의 날씨였다.   
실은 이미 전날부터 대대적인 한파예고를 접한 우리는 핫팩과 따뜻한 음료 등을 준비하면서도 걱정과 미안함에 사로잡혀 초조하게 기다렸어야 했다.   

이미 만들 때부터 경복궁 내에서 수도 없이 길을 잃던 내가 지도를 따라 걷기만 해도 2시간이 걸리는데, 사람들은 추위 속에서 미션까지 해결해야 하니 3시간을 더 넘게 걸릴 것이다.    


기획자로서 변명을 덧붙이자면,주인공이 조선으로 돌아가 한 역사적 인물의 생의 마지막 날을 쫒는 설정을 보다 실감나는 동선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과거 인물이 궁궐 내 드나들었을 법한 경로로 만들고자하는 욕심 탓에 훨씬 미로 같은 동선이 탄생되었다.


퀘스트 구성 또한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정도의 난이도로 만들어 의도치 않게(?) 테스터들에게 고난을 선물할 예정이었다.
미숙한 초짜 기획자가 사람들의 체력과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 플레이시간이 무한정 길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그때 깨달은 것이었다.

이들은 진짜 경복궁에 갇힌 것과 같겠지..  


불안함과 초조함 속에서 관광객으로 위장해 테스터들(참가자)들을 몰래 쫓아다니며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일본에서의 내 표정도 저랬을까? 즐거운 표정보다는 인상을 잔뜩 쓰며 미션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수천번도 넘게 후다닥 달려가서 '저기로 가셔야 해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지켜봤다.    

혹여나 다음 장소로 넘어가지 못한 참가자들이 보이면 낑낑거리며 주위를 기웃거렸더랬다.

'하.. 역시 너무 어렵게 만들었나 봐. 게임을 포기하면 어쩌지? '

관광객 틈에서 쉼 없이 중얼거리는  꼴을 보다 못한 대표가 결국은 나를 끌고 카페로 데려가고 나서야 겨우 내 스토커 짓이 끝날 수 있었다.

멀리서 숨어서 촬영한 모습

너덜너덜해진 미션지

카페에 끌려가서도 마냥 마음을 놓을 순 없었는데 카톡으로 문의사항, 힌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간이 이렇게 작아서야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
그때 든 생각이라곤 정식으로 게임이 출시했을 땐 어디 외딴섬에 숨어있어야겠다는 망상뿐이었다.    

약 3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새빨개진 얼굴의 참여자들이 최종 집결지인 카페로 하나, 둘 돌아왔다. 얼음장 같은 손에 들린 너덜너덜해진 미션지를 보자 도저히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미안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게임을 만들 땐, 촉박한 시간 내에 만든다고 고생한 우리 팀만 생각했는데 진짜 고생한 이들은 초짜 기획자의 난해한 게임을 풀어낸 눈앞의 그들이었다.

따뜻한 차와 함께 꽁꽁 언 몸을 조금 녹이고 나서야 심층적인 설문을 할 수 있었고 팀원들은 각각 참여자들을 나눠 맡아 [게임의 만족도, 난이도, 장소, 소요시간, 비용, 구매의사 등등]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제 점수는요?

[문제가 안 풀리 때는 미칠 것 같았는데, 해결했을 때 쾌감이 생각보다 크네요.]

[경복궁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적이 살면서 없었어요. 하하 꿈에서도 경복궁이 나올 것 같아요]  

[이건 커플끼리 하면 백퍼 싸우는 게임이에요. 머리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 듯하네요]

[낯설었지만 해볼 만했어요. 아, 오늘같이 추운 날은 말고요..]


10점 만점에 5점에서부터 8점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괜찮은 경험이라는 평가를받았다. 물론 보완해야 할 사항이 60~70퍼센트는 달했지만,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고 다음에 다시 하고 싶다는 말들을 전해주었다.  


이는 우리의 게임이 테스트로만 끝나지 않고 계속해도좋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했기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오버해서 내가 만든 첫 가상인물이 경복궁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손을 흔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장 준비가 덜 된 콘텐츠였지만 아마, 인생 첫 제작 게임이라서 이 날의 행복감이 더 소중했을 수도 있다.


그날 본 1% 가능성 덕분에 지난날 심사위원이나 주변의 부정적 평가에 한껏 풀이 죽어있던 우리의 사기도 크게 상승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 어쩌다 당시 만들었던 결과물을 보면 차마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런 미숙한 게임을 매서운 한파 속서 무려 3시간 가까이 즐겨주신 분들께 평생 감사해야 한다.   

(이 글을 보지 못하겠지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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