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알못이 어쩌다 게임기획자가 되었을까?
머리가 텅 빈 상태가 찾아오다.
게임 기획을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뇌가 새하얀 백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잘 모르는 것은 공부를 해서 배우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어떠한 아이디어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건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기획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할 무렵 예고도 없이 뇌가 텅 빈 상태가 찾아들었다.
평소와 같이 회의도 하고 스케줄까지 알차게 잡았건만 책상애만 앉으면 뇌가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않았다.
비록 창의적이진 않았어도 기획 작업을 위한 영감의 조각들을 요리조리 이어 붙일줄은 알았는데
어째서 텅텅 비어버린 뇌는 조각들을 그저 바라만 볼 뿐 유의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더욱 심각했던 건 마감 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려는 의지조차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난 직감했다. 아주 지독한 슬럼프가 왔구나
슬럼프는 예고 없이 찾아와
당시 회사의 재정적인 문제로 자체 콘텐츠를 제작하는 비중보다 외주 작업의 비중이 훨씬 커져 최소 3개월에 1개씩은 이벤트용 게임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작업할 때마다 새로운 컨셉와 다른 장소를 기반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지겹거나 반복되는 일은 아니다.
다만 제작 기한이 짧았기에 늘 마감 압박에 시달렸을 뿐이었다.
서로의 합의 척척 맞았던 콘텐츠 팀은 경주마처럼 낮에도 밤에도 그리고 휴일에도 숨 가쁘게 일을 해왔었다.
대표가 최대한 동시에 2개의 과업이 겹치는 일은 없도록 해주려 힘썼으나 개인적으로 잘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늘 타이트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체력적으로만 힘들 뿐, 정신적 타격은 없었다.
결승선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경주마 같았으니까. 그저 피곤한 건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슬럼프는 아이러니하게도 미친 듯이 바쁘게 달려온 1년 뒤, 드디어 여유가 생겼을 때 찾아왔다.
외주 일들을 모두 쳐내고 자체 콘텐츠 개발에 힘을 쏟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외주가 아닌 우리만의 자체 콘텐츠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뻤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몸과 마음 둘 다 도통 따라주지 않았다.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이제야 주어졌는데 텅빈 영혼만이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흐릿한 상태로 자가복제를
흐리멍텅한 상태로 작성했으니 초기 기획안도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건 이전에 만들었던 게임들의 괜찮았던 요소들을 조금씩 짜깁기 한 자가복제품 같았다.
1차, 2차, 3차 수정이 지속되자 지독한 슬럼프 늪에서 못 빠져나올까 봐 두려웠다.
우스운건 뇌는 텅 비고 흐릿한 상태였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마치 마음속 폭탄 시계가 멈추는 방법을 모른 채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
불안한 마음속 시계를 끌어안고 주말에도 꾸역꾸역 사무실로 향했었다.
그렇게 자리에 몇 시간씩 그냥 앉아있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오는 날이 지속되었다.
쉬는것도,그렇다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 불안정한 상태가 나날이 지속된 것이다.
사무실 밖 도피처를 찾아서
자택 근무가 자유로웠기때문에에 날이 좋은 날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경으로 밖을 떠돌았다.
한날은 SNS에서 미리 봐뒀던 카페에 짐(노트북+마음의 짐)을 이고 지고 용산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도착한 카페는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협소해 맘 편하게 작업을 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기껏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용산까지 왔는데 그냥 되돌아갈 순 없어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계획, 즉흥적 인간답게 일 대신 박물관을 택한 것이다.
그동안 어깨를 짓눌려온 무겁디 무거운 가방까지 물품보관함에 넣으니 한결 편했다.
기껏 사무실을 탈출해서 도착한 곳이 박물관이라니 슬프면서 웃겼다.
한동안 박물관 대상으로 한 외주작업 덕분에 여러 박물관을 자주 왔다 갔다 했었는데 그 기간 동안 정이들었던가보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니...
무작정 찾아간 웅장한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각국에서 온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말같은 분위기였다.
어떻게 평온할 수 있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을 홀로 떠돌아다닌 지 3시간쯤 지났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흘러들어 간 곳은 그 유명한 '사유의 방'이었다.
사실 뉴스로 몇 번 접한 게 다였던 터라 주변에 들리는 사람들을 웅성거림을 듣지 못했다면 내가 서있는 곳이 유명한지도 몰랐을지 모른다. 둘러보니 여기저기 반가사유상을 담기 위한 촬영이 한참이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운데 반가사유상의 표정이 유독 평온해보이는 건 왜일까?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홀리듯 나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거울 속 비친 내 얼굴은 [근심+피곤+ 짜증] 종합세트가 되어버렸다.
평온한 반가사유상을 보는데 문득 최근들어 마음 편히 쉬었던 적이 생각나지 않아 슬펐다.
분명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일주일에 최소 1번은 사무실 일탈을 하려고 노력했다.
주로 전시관, 서점, 동네 작은 가게들 등등에서 시간을 보냈고 발길 닿는 대로 그저 돌아다녔다.
"신기하게도 머리가 확 트였고, 아이디어가 솟구쳤다."라는 결말을 쓰면 참 좋을 것 같지만 현실은 마음속에 안고 있던 시안폭탄 시계를 내려놓는 정도로 좋아졌다.
그래도 무엇보다 내가 '내 일'을 얼마나 좋아하고 좋아했는지를 밖에 나왔을 때 더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
일탈의 최대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때의 습관들이 남아서 요즘도 가끔 답답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서점이나 전시관을 찾는다.
그리고 유령처럼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떠돌아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