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간기록자 Apr 11. 2024

09. 쓸모없지만 잡다한 능력사전  

겜알못이 어쩌다 게임기획자가 되었을까  

장점은 무엇인가요?   

어느 날 대표와 팀원들과 인터뷰를 요청하는 연락이 왔다.

팀 인터뷰는 종종 했지만 주로 대외적인 소개는 대표가 전담했기에 살짝 긴장을 한 채로 장소로 향했다.

기본적인 사업 소개, 역할 소개가 끝나자 예상치 못한 서로의 장점을 묻는 시간이 찾아왔다.          

" 대표님이 생각하는 기획자의 최대 장점은 무엇인가요? " 


대표 :  우리 팀의 기획자(나)는 성실해요. 그게 그녀의 최대 장점이에요..................


그는 이에 대한 부연설명을 열심히 하였지만 내 귀에는 오직 '성실'이란 단어만 들릴 뿐이었다. 

성실한 것이 장점, 오직 성실, 성실..


'성실'이라는 단어는 죄가 없는데, 듣는 순간 그가 너무 미웠다.

많고 많은 장점들 중에 왜 하필 '성실'일까. 그건 노력하면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거 아닌가?  

반짝반짝한 영감이 넘치는 친구예요라던가, 창의적인 사람이에요 와 같은 말을 기대했던 것일까.


뇌리에 꽂힌 그 말은  꼬리표처럼 따라붙어 어느새 열등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온통 재능 있는 사람들 뿐  

아이디어는 점차 고갈되고 겨우겨우 즙 짜내듯 짜내야 기획안을 써낼 수 있는 시기가 왔다. 

내 안에 삐뚤어진 자아는 스스로를 성실함 밖에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게 하곤 했다. 


팀원들과 편집샵을 가거나 혹은 알던 창업팀의 콘텐츠를 함께 볼 때면 대표의 반응이 유독 신경 쓰였는데, 가령

대표가 "역시 이 친구는 센스가 좋아. 타고난 감각이 좋은 것 같아."와 같이 말하면 괜스레 홀로 우울해져서는 "내겐 타고난 재능이 없지."라는 생각을 하는 식이었다.  


여기저기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자기 일을 잘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만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게임기획자로서의 특별한 재능을 요한 적이 없건만 없는 밑천이 드러난 것 같았다.    


성실의 역사

20대 초에 문화기획자 막내로 일 할 때 정말 성실하게 일했던 적이 있다. 

부족한 실력은 메꾸기 위해 매일 야근을 불사하며 사무실에서 2년 가까이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시간 안에 척척 끝내는 선임을 보며 그녀처럼 꼭 '레벨업'해야지라고 다짐했었다.   


행사가 많았기에 주말, 공휴일도 없이 쉴 새 없이 일을 했다.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잘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고 싶던 탓에 체력을 모두 갈아 넣었다.

 

그러고 어느 한날, 저녁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남아있는 이 순간이 끝나지 않는 악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결승선이 없는 끝을 향해 무작정 달리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난 결승선을 달리는 걸 그만하기로 했다.

끝이 있다는 착각

그런데 몇 년이 훌쩍 지나 완전히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또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거기다 커다란 칭찬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게임을 하다 보면 좋은 점이 게임은 목숨을 잃거나 지더라도 언제든 다시 도전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실수를 반복했을 때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격이다.  


그래서 난 게임의 앤딩 장면을 기획할 땐 늘 완전한 결말로 끝내지 않고 미래에 또 만날 수 있음을 은연중에 넣어뒀었다.  <계속, 다음 미션에서, 앞으로...>


이런 앤딩의 멘트가 필요한 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계속 

지금 그리고 계속 나가야 하는 가잘 필요한 건 지치지 않는 마음, 성실함 일지도 모르니까.  

'성실'이라는 단어를 내 잡다한 능력 사전에 추가하기로 했다.  

쓸모없지만 잡다한 내 능력들 

20~30명의 단체 고객들의 게임 진행을 위해 즉흥적으로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게임을 판매하기 위해 홍보물, 상품 페이지를 만들 수 있는. 

테스트 인원 모집을 위해 부끄러움 없이 길에서 설문을 돌릴 수 있는. 

아주 오래된 고서도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여기저기 주워서 모은 갖은 경험들이 쌓인 내 <잡다한 능력 사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만능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또 뭐가 추가되려나"  편하게 기다려보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8. 제 말이 잘 들리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